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듣기 좋게 말이나 잘하고 보기 좋은 얼굴빛이나 꾸미는 자들 중에는 어진 이가 드물다."①
단언하지만 이 말이 맞고 꼭 인(仁) 해야 한다면 절대 먹고살 수 없다.
우리는 눈빛을 통해 수시로 복종과 친밀감을 오만 군데 표시해야 하며 허리를 굽혀 공손함을 습관화해야 한다. (이때 두 손을 포개 아랫배 위에 얹으면 더 좋다) 이점은 높으신 군자(君子)와 우리 소인이나 매일반이다. 다만 군자의 경우는 재수 없게 걸렸을 때만 가끔 그러면 되지만 우리 소인들은 매일, 평생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해야 먹고살 수 있다.
이러한 언사와 태도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러한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문제이고 사정일 뿐이다. 누가 힘들고 피곤해 죽겠는데 실실 웃으며 다정하게 바라보고 싶겠는가? 누군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끝까지 들어가며 성질 죽이고 정해진 매뉴얼대로 정중히 응대하고 싶겠는가?
북경 대에서 교수 질➂ 하는 리링(李令)에 따르면 공자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곧 "무표정하고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람이 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④
만약 집에서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일주일이면 쫓겨나는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볼 때 공자가 이야기하는 군자의 언행(言行 -말과 태도)을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공적인 영역은 물론 사적인 영역에서도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최근 우리는 상업시설은 물론 구청 등 공공기관에서도 방문객 안내를 위한 AI 로봇이 돌아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로봇들은 귀여운 모습으로 실실 웃고 있는 얼굴도 있고 관련 정보도 매우 유창한 말로 전달하고 있다. 만일 위와 같은 해석이 맞고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한다면 안내 로봇들도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말을 적게, 또는 무표정하고 어눌하게 말을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주둥이가 노랗고 솜털이 뽀송한 작은 새와 같던 누군가가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든 먹잇감을 찾는 대머리 독수리처럼 변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태도와 억양이 변치 않는 경우가 한 가지 있다.
"자기야~ 개똥 좀 치워"
그녀의 말과 행동이 인(仁)한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남아있는 그 다정한 말과 눈웃음에 나는 개똥 치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들이 목숨보다 중히 여긴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이 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았다.
교(巧)는 아름다움이요 영(令)은 선(善-잘함, 좋게 함)함이다. 그 말을 아름답게 하고 그 얼굴빛을 좋게 하여 외면에 꾸미기를 지극히 해서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인욕(人慾-사람의 욕심)이 함부로 부려져 본심의 덕(德)이 없어질 것이다.②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외우며 그렇게 실천했던 조선의 군자들은 일본에 밟히고 중국에 터지고 결국엔 나라를 말아 처먹었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소인 논어(小人論語)의 한 구절을 무표정한 얼굴과 어눌한 말투로 전달해 주고 싶다.
➂ 현대 조선족 표현이다. 한국어도 중국어 방언의 일부라고 할 때가 분명히 올 것이므로 시간 있을 때 미리 차근차근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가끔 조선말을 사용할 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쓰는 한자(漢字)에 대해 중국에서는 역외 방언(域外方言-중국 밖 사투리)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