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비혼주의자였다. 정확히는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살겠다는 마음이어서, 부진정 비혼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거기다가 혹여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기는 낳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단 생각은 어릴 적부터 있었다. 너무 오래전이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기억한다. 난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작은 키, 못생긴 얼굴, 별로 내세울 게 없는 내 유전자를 굳이 자식에게 남겨서 어렸을 때 내가 가졌던 고통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사귀고 결혼까지 했다. 사귀는 중에도 그녀가 나랑 딱 맞았다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녀도 아기를 갖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인 우리 부부는 자연스레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처럼 살았다.
하지만 아기를 무조건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은 아니었다. 나는 아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원한다면 한 명까지는 낳고 키울 생각이 있었다. 아내는 당장은 우리 둘만으로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에 아기에 대한 생각이 없지만 언젠가 아기를 낳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시한부 딩크족으로 몇 년을 보냈다.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바로 아기를 낳고 싶단 거였다. 우리 둘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지만, 아기를 낳으면 더 다채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라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안 그래도 업무에 바쁘고 지쳐서 아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며칠이 지난 후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왜 아기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지를.. 아내는 내가 똑똑해서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작은 키라도 자존감이 높아 보여서 좋다고 했는데, 그런 그녀 앞에서 나는 날 닮은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서라며 속마음을 전했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해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는데, 내 진심을 꼭 전달해야겠다 싶어서 용기를 많이 냈다.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서 고맙고, 오히려 자기는 우리 아기가 자기보단 나를 더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덧붙여서 내가 부족한 게 뭐가 있냐며, 자신이 키가 크니깐(아내는 나보다 약 10cm 정도 크다) 2세는 괜찮을 거라고, 그리고 나를 닮아 착하고 똑똑한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했다.
나는 아내의 따뜻한 말에 수 십 년간 나를 옥죄어 왔던 유전자를 남길 정도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서 해방되었다.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늦었지만 우리, 이제라도 아기를 가지자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보다 나를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