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는 출산일기_가족을 완성시킨 자연주의 출산 이야기
“다녀왔습니다.”
아이를 위해 제대로 갖춰진 것 하나도 없는 것이 무안해서였을까. 아무도 없는 신혼집을 들어서며, 일부러 더 큰소리로 인사했다.
필요한 물건 때문에 나 혼자 몇 번 다녀가긴 했지만, 일주일간 비워두었던 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청소는 말할 것도 없고 급히 주문한 아기용품들 때문에 택배 상자들도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택배 상자나 먼지 따위가 아니었다. 무모하게 오기를 부려 집으로 왔지만, 우리 집 환경이 조산원보다 나을 리 없었다.
30년 된 구축 아파트는 웃풍이 대단했다. 창틀은 네 귀퉁이 중 제대로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해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드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건조한 겨울바람이 방안에 그대로 들이닥치니 습도도 문제였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은 사람이 없는 일주일 동안 얼마나 냉기를 머금었는지, 보일러를 아무리 틀어도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내쉬는 숨에 입김이 부옇게 서렸다. 아내와 아이는 겉옷을 벗을 수도 없었다. 온 집안에 한겨울이 들어차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망연자실, 망부석이 되어 고민하던 나는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집에는 빨래를 삶을 때 쓰던 큰 솥이 있었다. 물이 끓는 동안 김장할 때나 쓸법한 커다란 대야를 거실로 옮겼다. 커다란 솥에서 벌벌 물이 끓기 시작하자, 나는 끓는 물을 대야로 옮겨 부었다. 몇 번을 반복하니 그제야 따뜻하고 촉촉한 공기가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따뜻한 수증기 덕분에 거실에서 버티던 동장군도 물러가고, 메마른 공기고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내와 둥글이도 겉옷을 벗고 쉴 수 있었다.
겨우 숨은 쉴 수 있는 집이 되었지만, 정작 아이에게 필요한 건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산후조리원으로 갈 계획이었으니 기저귀나 유축기 같은 당장 써야 할 물건도 없었다. 그나마 조산원에서 나올 때 챙겨 온 신생아용 기저귀 몇 장이 전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가 집으로 온 날은 2017년 1월 28일, 설날이었다. 하필이면 연중무휴 가게도 하루는 쉰다는 설날에 일을 벌인 것이다. 기저귀를 구해야 하니 집 근처 마트부터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네 마트에서 기저귀를 구할 수 있었다. 둥글이가 쓰기에는 조금 컸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싸는 문제는 해결했지만, 먹이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내도 둥글이도 아직 모유 수유 초보였기 때문에 수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유축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수유하는 동안 아이를 받쳐줄 수유 쿠션도 사야 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발에 차이게 많은 제품들이 있었지만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아기용품점이 영업하고 있었다. 설날인데도 문을 열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아내와 둥글이를 집에 두고 나 혼자 아기용품점을 헤집으며 필요한 물건을 골라 담았다. 분유, 유축기, 수유 베개, 목욕용품…. 어차피 있는 게 없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전부 담아 오면 되는 일이었다.
“뭐? 그래서 지금 집이야? 조리원은 안 가고?”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으로 급해진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울산에서 설을 쇠고 있던 장모님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처음 계획은 아내가 산후조리원을 퇴소한 다음부터 장모님이 우리 집으로 오셔서 산후조리를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일주일이나 당겨서 집으로 와버리는 바람에 장모님은 설 연휴가 끝나기 전에 울산에서 고양으로 오셔야 했다. 결국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설 연휴 막바지에 갑작스레 길을 나서야 했다. 평생을 경남에서 사셨던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팔자에 없던 귀경행렬을 경험하셔야 했다.
24평, 실평수 18평의 신혼집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침대가 너무 높아서 안방에서 잘 수가 없었다. 거실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아이 목욕까지 시켰다. 거실 곳곳을 아기용품이 차지하고, 남는 공간은 끓는 물이 담긴 대야가 놓였다. 식탁에는 젖병과 분유가 놓이고, 협탁은 유축기와 가습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그야말로 혼동 그 자체였다.
다행히 그 복잡한 곳에서도 둥글이는 잘 자랐다. 아내와 장모님은 늘 부족한 잠과 싸워가며 둥글이를 보살폈고, 주말에는 내가 잠시 바통을 넘겨받았다. 전세를 정리하고 계룡으로 이사할 때까지 두 달간 우리는 굴 같은 신혼집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았다.
8년이 지났지만, 그 겨울에 갓난아기를 안고 들어섰던 우리의 신혼집은 그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가끔 근처를 지나게 되면 둥글이에게 옛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둥글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시절 돌아누우면 코가 닿을 듯 살갑게 부딪히며 지내던 그곳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우리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한 첫 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