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는 출산일기_가족을 완성시킨 자연주의 출산 이야기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내는 계룡시로 이사했다. 육아휴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룡시에는 우리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관사가 있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파트는 우리가 살던 신혼집에 비할 데가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가 계룡시로 이사하고, 비로소 나는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해군본부에서 2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2년 차가 되면서 일이 제법 손에 익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매번 일찍 퇴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점심시간에는 잠시 집에 들러 아내가 밥을 먹는 동안 둥글이를 맡아줄 수도 있었다. 집과 사무실이 5분 거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지낸 지 3개월 만에 나는 새로운 근무지로 발령이 났다. 다음 근무지는 경상남도 진해에 있는 잠수함 부대였다. 잠수함에서 근무하는 것이 해군본부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더 바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인사이동이 결정되고 아내는 걱정이 많아졌다. 나는 오래 근무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내를 달랬다. 실제로 나의 잠수함 발령은 석사 과정 입학을 앞두고 6개월만 근무하면 되는 짧은 인사이동이었다. 조금 바쁘기는 하겠지만 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세상 모든 낙관적 계획이 그렇듯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내가 맡은 “잠수함 부서장”이라는 자리는 적당히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책임져야 할 것도 많은 중요한 자리였다. 기를 쓰고 달려들어도 애매할 것을 “6개월만 버티면 돼.”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대했으니, 어쩌면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맞췄는지도 모르겠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자정을 넘겨 퇴근하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항해를 나가는 날은 며칠, 몇 주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함께 살고 있었지만, 아내는 혼자 버텨내야만 했다. 내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좌충우돌하는 동안, 아내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남편만 믿고 진해까지 따라온 아내는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전출이 약속된 시간은 6개월.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빠르게 지쳐갔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어도 항상 바빴다. 사무실에서는 집에 남은 아내 걱정에 일이 삐그덕거렸고, 집에 돌아오면 미뤄둔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다.
10월 결혼기념일,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예약한 적이 있다. 고생한 아내와 나를 위한 자리였지만, 둥글이가 칭얼거리는 통에 아내와 나는 번갈아 가며 식사해야 했다. 한 사람이 식사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건물 밖에서 아이를 달랬다. 설상가상으로 돌아올 때는 길까지 잘 못 들러서, 집으로 오는 내내 둥글이의 칭얼거림을 달래야 했다.
“일찍 와.”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나에게 아내는 항상 일찍 오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잘 다녀와”, “안전하게 다녀와”라고 인사하지 않는 아내가 늘 야속했다. “일찍 와.”라는 인사는 하루의 시작부터 족쇄가 되어 나의 발목에 들러붙었다.
그때쯤부터 나는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가 잠들고 나면 혼자 거실에 나와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노력하고 있는데, 내 삶은 점점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일은 점점 성과를 내지 못하고, 가족은 계속 힘들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더 잘할 자신이 없었다.
일과 가정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내 인생에는 내리막만 있을 거라는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맡은 일을 모두 실패하고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는 내 모습이 떠 올랐다. 미래의 나는 한직을 돌다가 진급도 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가족에게도 충실치 못해서 아내마저 나를 떠나고 없었다.
오늘이 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나를 위한 말 같았다. 잘해오던 나의 모습이 망가지는 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편안해지고 싶었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죽을 용기도 없었다.
그 해, 드문드문 군 장교의 자살 소식이 화제가 되었지만 나는 소문의 주인공이 될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이, 그렇다고 더 잘 살아갈 자신도 없이 반년을 보냈다.
몸과 마음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잠수함 근무를 마치고 석사 과정을 시작한 후부터였다. 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자,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잃었던 자존감도 회복되었다. 무엇이든 맡겨만 주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가 가장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마음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돌이 지나면서 둥글이도 전보다 훨씬 덜 보채고 잘 자기 시작했다. 육아가 수월해지니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모든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첫돌이 되기 전까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 그 시간의 기억에 따라서 부부가 평생의 전우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아내와 나는 힘들었던 그 시간을 함께한 것이 우리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첫돌이 될 때까지의 1년은 힘들고 서툴렀던 시간이었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더 잘 살아갈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모질고 긴 그 겨울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 누군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버텼냐고 물어보면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냥 견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시간이라 해도 분명 행복하고 좋았던 순간이 켜켜이 끼어들어 있다. 잠들지 않는 둥글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함께 새벽 산책을 하며 편의점 야식을 사 먹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추억이다. 온 세상이 진창처럼 바닥으로 잡아끄는 것 같아도,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을 잊지 않는다면 결국 뻘밭을 빠져나와 다시 달릴 수 있는 것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힘듦이 정말 내가 부족해서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보낸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는 힘든 시기였다. 아이는 계속 자란다. 하루만큼 자라면, 하루만큼 쉬워진다. 육아에서 오늘은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가장 힘든 순간이다. 날이 갈수록,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더 편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밤 아이를 재우느라 불 꺼진 거실을 쉼 없이 걷는 당신의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