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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오찬 Jun 15. 2021

일제 수탈이 남긴 흔적, 나주 곰탕

전라남도 나주시 중앙동 나주곰탕하얀집


흥선대원군이 "나주에선 세금 자랑하지 말라"했을 정도로 나주는 호남 경제의 중심지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나주 영산포 등대와 황포돛배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도로가 발달하기 전 내륙 제일의 포구인 영산포가 있어 호남의 물산이 집결되며 전국에서 5일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 역시 나주이다. 현재의 전라도(全羅道)가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글자를 따와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만 봐도 그 옛날 나주의 영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데다 농경에 필요한 소들을 키우는 목축업이 발달했고, 이에 더해 포구까지 발달하여 풍요롭기만 했던 나주에서 시작된 맑은 곰탕의 유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의 병참 보급 목적으로 한반도를 수탈하였는데,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급할 주요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소고기 통조림>이었다. 평야가 많아 농사를 짓기 위한 경작용 소가 많았던 것에 주목한 일제는 1916년 일본인 사업가 다케나카 신타로를 앞세워 통조림 공장을 설립하여 조선 한우를 수탈하였다.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이었던 화남산업 폐공장 (우측 조형물 상단에 소머리 그림과 일본어를 통해 과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풍요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빼앗아 갈 것이 많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 중요한 가축으로 도살이 금지됐던 소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하루 400여 마리가 도축되었다 하니 힘없고 나약했던 당시의 슬픈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거나 나주 지역의 곰탕은 일제 치하 통조림 공장에서 사용하지 않는 소머리와 내장 부위를 싸게 납품받아 조리하다 보니 소뼈를 우려내는 다른 지역의 곰탕에 비해 사골(四骨)의 사용비율이 현저히 낮은 데다 2등급 이하의 고기에서 나오는 누런 기름을 끊임없이 걷어내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맑은 국물>이 특징이 되었다. 물론 이는 시대가 만들어낸 아픈 레시피일 뿐 현재는 좋은 등급의 양지와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에 맛이 특히 깔끔하고 개운하다고 알려져 있다.


2020년 방문 당시 간판과 최근 리모델링한 모습

나주시 금성관 인근 곰탕거리가 조성되어 수십 년 노포가 즐비하다지만, 나주 하면 곰탕이라는 등호 공식을 만들어낸 곳은 <나주곰탕하얀집>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1904년 개업한 서울 종로의 이문설렁탕이고, 그 뒤를 잇는 노포가 바로 1910년 문을 연 나주곰탕하얀집이다.


애초부터 이 식당의 상호가 나주곰탕하얀집이었던 것은 아니고, 원래는 <류문식당>이란 이름으로 개업하여 장터에서 해장국과 국밥을 판매하다가 1960년 3대 계승자인 길한수 명인(名人)이 곰탕 전문점으로 전환하였고, 하얀집이라는 상호는 1969년부터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곰탕 토렴과정 (출처 : 하얀집 홈페이지)

이 집의 주요한 차별성 중 하나가 바로 <토렴>이다. 운 좋게 주방 앞에 앉아 국자로 밥을 부수고, 국물을 따랐다가 덜어내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 밥알이 국물에 불려져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팅된 듯한 식감을 준다는 점에서 국말이 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토렴 과정을 거친 곰탕은 가장 먹기 좋은 온도로 손님상에 오르게 된다.


맑은 고기 국물에 녹색과 하얀색의 채 썬 대파, 노란색의 지단, 지단 위에 뿌려진 붉은색 고춧가루 등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다. 첫맛은 밋밋하나 먹을수록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담백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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