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탄피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채현주 병장은 네 아이를 둔 아빠다. 중학교 3학년 때 첫째를 낳았다고 한다. 모두의 얼굴이 거무튀튀한 군대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다크한 사람이었다. 다크한 건 그의 피부였다. 두꺼비 같은 검은 얼굴과 그보다는 조금 밝은 두터운 입술까지, 과거 어느 시점에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을 거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금관 연주자로서 타고난 입술을 잘 살리지 못하는 부족한 음악적 재능으로 병장임에도 튜바 연주가 서툴렀다. 그래서 합주를 할 때면 항상 군악대장에게 구박을 받는 안타까운 선임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부대 내 간부들이 군침을 다시며 부사관 지원을 종용할 정도로 작업과 훈련에는 특 S급이란 평을 받았다. 착하고 우직한 성격에 선후임 사이에서 신망도 두터웠다. 성인이 되기 전에 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일찍 철이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특히나 부대 내 후임들을 동생처럼 따뜻하게 보살폈다. 갈굼이 난무하는 군악대 내에서 선임의 갈굼에도 능구렁이처럼 잘 넘어가고 후임의 잘못도 기분 나쁘지 않게 고쳐주는 안 되는 성인군자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듣기 힘든 쌍욕이 나왔다.
"미친 대머리 새끼네, 그거! 쓰레기 같은 뱀새끼. 사령부에 수류탄 까버릴까보다."
행정관과 군악대장의 불평을 엿들은 그는 다시 산비탈로 올라와 군악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목적의식 없이 강제되는 노역은 너그러운 이들까지 짜증이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가 전한 메시지가 점화가 되어 아슬아슬 끓고 있던 냄비에 물이 넘치듯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욕하고 침 뱉고 화내는 것 말고는. 사단에서 사단장은 말 그대로 신이었으니. 미천한 사병은 쉬이 영접할 수도 없다. 군생활 중에 한 번도 사단장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없는 사병도 존재했다. 그 역시도 아주 간혹 늦은 밤 위병소에서 검은 에쿠스의 짙은 선팅이 된 창문 너머로만 실루엣을 보았을 뿐. 또는 가끔 부대 내 행사 때 저 멀리 구령대 위에 서있는 모습만 바라보거나.
한 집단 구석구석까지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가진 무의식이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그가 신병이었을 때 사단에서 한 사병이 가혹한 구타와 괴롭힘을 못 견디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직후 사단장의 명에 따라 ‘다중밀착감시체제’라는 제도가 생겼다. 병사는 부대 내 어디라도 혼자 있지 못하게 만든 제도였다. 심지어 큰일을 볼 때도 누군가와 꼭 같이 있어야 했다. 제도명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던 한 간부는 재떨이를 맞을 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그 제도의 이름은 ‘병상호관심체제’라고 조금은 유하게 바뀌었다. 내용은 다를 바 없었으나. 그가 막 자대배치를 받은 직후 시행된 그 제도는 그에게 이전보다 집요한 갈굼 세례를 선사했다. 선임과 떨어져 있을 수 없었으니. 그리고 당연히도 현실성이 너무도 떨어지는 포악한 제도는 그가 일병으로 진급할 때 즈음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아마 사단장 본인이 먼저 잊었을 테고, 사병들의 원성에 괴로웠던 간부들은 은근슬쩍 모른 체 했으리라.
그런 여엇같은 사단장이 이번에는 산을 뒤집어 분실한 총알을 찾으라 한다. 말이 작은 동원사단이지 산 하나를 둘러싼 광활한 부대였다. 사단 내 전 지역을 뒤지라니. 부대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제외하고는 전원 수색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부조리는 저기 밑의 신병에게 까지 가닿는 것이다. 아마 오늘 저녁에도 막내들은 생활관에서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선임들의 피로와 짜증을 받아내야 할 테다. 누군가는 잠들기 전 내일 깨어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들은 행정관 외 간부들의 지휘 아래 산 아래에서부터 비탈을 오르며 흙을 삽으로 파고 꼬챙이로 찍고 괭이로 긁었다. 파고 찍고 긁을수록 사람들의 짜증과 미움, 사단장에 대한 저주스러운 중얼거림은 커져갔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땅 속에서 깨진 유리병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썩은 천 조각, 버려진 전투화 한 짝 등을 발견하긴 했지만 탄피 비스므리한 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 끝나는 거지. 급체로 인한 구토와 두통을 분노로 회복한 그가 어금니를 꽈악 깨물며 쉭쉭 거릴 때 즈음 근처 간부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과한 몸짓으로 허둥지둥하거나, 수색 중인 병사들에게 뭐라 뭐라 삿대질을 하거나. 여하튼 평범하지 않은 모습에서 그는 간부들의 긴장감을 느꼈다. 조금만 눈치가 있는 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자명하게도 높은 계급의 누군가 여기로 오고 있는 중이다.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어깨너머로 사단장이 수색작업의 진척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납신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단장의 복부를 쑤신다 상상하고 꼬챙이로 한 나무 옆의 땅을 푹 쑤셨다. 씨펄. 주변 다른 군악대원의 수색도 좀 더 격렬해진 듯했다. 그들도 속으로 자신이 가진 장비로 대머리 엿같은 사단장을 쥐어패고 있지 않을까.
간부들의 어수선한 움직임이 정리될 때 즈음 근처에서 “충성!”하고 우렁찬 경례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다. 그는 다른 부대원들이 하는 대로 장비를 왼손으로 들고 비탈길 아래로 몸을 틀어 차렷 자세를 취했다. 사단장과 몇몇 고위 간부들이 걸어 올라왔다. 한쪽 구석에 본부대장도 서 있었다. 행정관은 큰 소리로 외쳤다.
“부대에. 차려엇! 충! 성!“
사단장은 행정관의 경례를 가벼운 목례로 받았다. 두툼한 두 턱 위로 뭉툭한 코와 누렇게 뜬 눈동자. 전투모 위에 달린 은색의 별 두 개. 꽤나 큰 등빨에 걸쳐진 야상. 숨길 수 없는 술배와 허벅지가 좌악 달라붙는 전투복 하의. 반짝이는 전투화. 고위 장교의 필수 액세서리인 지휘봉까지. 살찐 사자의 괴상하게 위엄 있는 형상이었다. 아무리 병신이라도 장군은 장군이란 말인가. 눈앞에서 본 사단장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러나 저 새끼는 멍청함에 틀림없어. 그는 애써 사단장이 풍기는 포스에 압도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 다들 고생이 많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조금 더 분발해서 꼭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짧은 격려의 말에는 그의 무지와 폭력성이 담겨있는 듯했다. 아. 이 들끓는 분노를 잠재울 방법이 정녕 없다는 말인가. 그는 뒤돌아 우르르 돌아가는 사단장 이하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어. 술로 뒤룩뒤룩 찐 몸으로 비탈길을 내려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사단장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한 발 한 발 위태롭게 내려가고 있었다. 몸뚱이가 술에 절어 있을 테지. 분노는 그의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손을 올렸다. 익숙한, 낮은 수준의 주문을 조용히 읊고 근육이 아닌 마력에 힘을 주었다. 흡. 그 순간 사단장이 디디기 직전인 경사면의 흙이 ‘푹’하며 밑으로 꺼졌다. 그는 슬로 모션 같은 사단장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마력을 집중시켜 땅의 일부를 파버리는 ‘디그’ 스펠로 인해 사단장이 디뎌야 할 부분이 작게 움푹 파였다. 예상했던 깊이보다 다리가 아래로 떨어지며 사단장은 천천히 중심을 잃었다. 발바닥이 구덩이에 빠지며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손으로 땅을 짚을 겨를도 없이 고꾸라지며 텀블링을 하듯 앞으로 몸 전체가 돌았다. 뒹굴뒹굴. 울퉁불퉁한 산비탈을 따라 작게 지그재그를 그리며 굴러 떨어졌다. 우당탕탕. 사단장은 이내 저 밑에 기괴하게 엎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