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할아버지는 일본어를 했다

by 하린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멋쟁이였다.

항상 단정한 자켓에 주름이 쫙 잡힌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고 다니셨다.

그리고 늘 중절모를 쓰셨다.

그렇게 멋있는 분이셨는데,

머리 위는 좀 휑했다.

그래서 모자를 즐겨 쓰셨던 걸까.


그런 할아버지가

내 눈엔 더없이 멋있어 보였던 순간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일본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셨다.


어린 나에겐 그게 너무 신기했다.

할아버지가 일본어 책을 술술 읽고,

일본어 문장을 막힘없이 말하시는 게

마치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똑똑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할배, 할배는 왜 이렇게 일본어를 잘하는데?

진짜 멋있다, 할배!”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할배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냥 “아, 그런가 보다” 싶었다.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식민지’라는 말의 무게도,

‘일제 강점기’라는 단어의 잔혹함도

잘 몰랐다.


그저, 우리 할아버지는

두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할배, 나도 일본말 가르쳐줘!”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내일 학교 가거든 선생님한테 이렇게 인사해봐라.

센세, 오하요 고자이마스.”


“그게 뭔데?”


“선생님, 안녕하세요.”


와. 신기했다.

어린 나는 그냥 그게 다였다.

그 시절 할아버지가 어떻게 일본어를 잘 하는지는

당연히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올라가며

역사책에서 우리나라의 과거를 조금씩 배우고,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실상을 접하면서

그제야 알게 됐다.


그건 멋있어서 배운 언어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서 배운 게 아니었다.

그건 억지로 주입당하고,

외우지 않으면 맞았고,

‘모국어’를 빼앗긴 채 살았던 시대였다.


할아버지는 소학교를 다니셨다.

그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총칼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일본어를 배우셨단다.


그 말을 떠올리는 지금의 나는,

할아버지가 멋있다기보다는

가엾고, 짠하다.


나는 좋은 시대에 태어났고,

풍족하진 않아도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배고프고 고달프고,

무서운 어른들에게 언어까지 빼앗기며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를,

훗날 손녀에게는 웃으며 가르쳐주셨다.


그게 다였다.

단지, 웃으며 말해줬을 뿐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증조할아버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깜짝 놀랐다.

진짜 일본 사람처럼 생기셨다.

얍실한 콧수염에 간신배처럼 생긴 얼굴.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아주 일찍 돌아가셨다고만 들었다.


그런 시대를 살아낸 우리 할아버지.

그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건,

더 이상 ‘능력’이 아니라

고통의 증언이었다.


누군가는 지금도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그 말은

정말 배우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외워야 했지만,

가장 마음이 아팠던 말.


그리고 이제,

그 말을 따라하던 나도

그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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