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얻은 귀중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으면 자도 되는 온전히 내게 주어진 나만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수 십 년 동안 내 몸에 익숙해진 루틴은 나를 그렇게 만들지 않고 있었다. 나의 뇌 역시 루틴을 흐트러 뜨린다면 아버지에게 유산대신 물려받은 고혈압과 당뇨가 발병될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이 언제나 7시경에 일어났다. 수경과 방수 헤드폰, 스마트 폰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겨 수영장 옆 호텔 간이식당으로 향한다. 수영장 가는 길에는 호텔 주방이 있는데 그곳에 아침식사를 부탁하고는 바로 수영장으로 입수한다. 발리 '복근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인 아침 공복 수영이다.
그렇게 식사가 나올 때까지 몇십 바퀴 돌고 나면 내 배는 어느새 홀쭉하게 들어가고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때쯤 나온 아침 식사를 맛있게 먹은 후 나는 브런치 글을 쓰고, 인스타그램 동영상을 만들고, 구상하고 있는 웹소설을 작성한다.
오늘도 그렇게 여여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성급한 오판이었다. 호텔에 새로운 식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두 명은 10대 후반으로 보였고, 나머지 한 명은 수엽이 덥수룩한 게 그들의 아빠 거나 삼촌으로 보였다. 큰 소리로 독일어를 쓰는 것을 보니 아마 독일 사람이거나 오스트리아, 또는 그 외 독일어를 쓰는 유럽의 어떤 나라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처음 눈을 마주칠 때부터 분위기가 싸한 것이 느꼈졌다. 보통 이곳 발리에서는 우연히라도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미소라도 건네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쳐도 무표정한 표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20년 만에 혼자만의 휴가를 얻어 즐거운 나의 기분이 망가질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들이 숫기 없는 가족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식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들은 6미터 남짓 되는 조그만 수영장을 독차지 한 채 공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칠게 노는지 사방으로 물이 튀기 시작했고 그들의 목소리는 호텔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비교적 방음이 잘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헤드폰을 썼음에도 그들의 고함소리는 그 첨단 기술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나의 글쓰기를 방해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글 쓰기를 포기하고는 그들과 좀 떨어진 썬베드에 누워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촤악!!!"
그들이 던진 공에 튀긴 물이 갑자기 나를 덮쳤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는 자신들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짓고는 그들을 향해 물이 튀겼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신호를 못 본거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후 약속이 있었던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촤악~~~!"
이번에 나를 덮친 물은 강하고 양이 많았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저기요. 지금 내게 물이 튀었거든요?"
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물이 튀었다는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그 화가 난 와중에도 파파고를 뒤져 그 단어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굳은 표정으로 화를 냈다.
" Excuse me. Water is splashing on me!!!"
그제야 그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뭐 그런 것 가지고 화를 내냐는 표정 같았다. 미안한 표정은 전혀 없었다.
"you can lie on the other bed."
한눈에 봐도 싹수없어 보이는 울 아들 또래의 아이가 내게 다른 베드로 옮기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pardon?"
예의라고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 듯한 녀석에게 너 다시 한번 말해보라며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매섭게 쏘아보며 말을 하자 그제야 녀석이 나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화난 것은 녀석이 아니라 녀석의 아빠로 보이는 이였다.
'아빠라는 사람이 공공장소에서의 매너를 이 정도로 밖에 가르치지 못해?'
어쩌면 8년 전, 11살, 9살 되는 아이들을 끌고 유럽여행을 다녔던 내 기억이 되살아나서 더욱 그러했는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되도록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 필요이상으로 엄격하게 굴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부끄럽게 행동하면 안 돼."
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도 이런 말을 하며 공공장소에서의 예절과 규칙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들의 아빠는 도대체 뭔가? 그들은 이곳이 개인 풀장도 아닐진대 마치 전세를 낸 것 마냥 예의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람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갑자기 '이 놈들 지금 동양인이라고 무시하고 있는 것 아냐?' 하는 생각까지 이르자 지난 한 달 반 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던 나의 툴툴이가 출동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미안해요."
그제야 아이들의 아빠가 내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내게 무언가 말대답을 하려는 큰 아이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지만, 말로만 미안하다고 했지 표정은 별로 그래 보이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다 된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호텔 입구로 나왔다. 그곳에는 서핑보드를 챙긴 채 바이크를 타려는 다른 숙박객이 있었다.
"헬로!"
나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 역시 밝게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줬다.
"지금 서핑하러 가는 거야?"
"응."
"숏보드인 거 보니까 서핑을 잘하는 모양이네."
"꽤 오래 서핑을 했거든. 작년에도 이곳에 3개월 정도 있었어."
"오, 대단해. 나도 지금 서핑하러 가. 그동안 서핑 레슨을 받다가 오늘은 처음으로 나 혼자 타보려고."
"오, 좋은 걸? 그런데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어?"
"응 한국, 북한 아니고 게다가 난 김정은을 매우 싫어해."
"하하, 나도 네가 남한에서 온 정도는 알아. 나도 어제 한국에서 오는 길인데?"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짓는 내게 현재 서울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한국 참 좋아. 나는 일본도 많이 다녀봤는데 내게는 한국이 더 잘 맞는 것 같아."
"하하, 고마워. 우리나라 사람들이 에너지가 넘치고 다이내믹하긴 하지."
"만나서 반가웠어. 서핑 재미있게 해."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생각했다.
세상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중에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사람들은 방금 만난 친구와 같이 바르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