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나는 2학년이었고 학사경고 몇 개를 가지고 있었다. 1학기를 마치고 군대로 떠났으니 나의 사회적인 삶은 겨우 하나의 학기였던 해다. 그 학기의 내 사랑은 진심이었다. 화려한 행색의 후배가 시뻘건 장지갑에 지폐 다발을 꽂고 다녔는데 가끔은 내게도 동행을 권유했지만 나는 왠지 싫었다. 솔직히 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여름에, 그 여름에 입대를 해야 했으니 아침나절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속옷을 거꾸로 입고 있기 일쑤였다. 술에 취해 집 마당에 무릎을 꿇고 기형도가 쓴 ‘입 속의 검은 잎’을 읊었다. 읊었고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챠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의 1악장부터 피날레까지 허밍으로 불렀다. 나는 그 곡을 너무도 좋아해서 아마도 내 머릿속엔 므라빈스키의 연주가 들어앉아있었을 것이다. 교향곡의 테마는, 민해경이 유행가로 만들어 불렀다.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였다. 취하면 과거로 돌아가야 하지만 내겐 과거 같은 것이 있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내가 돌아간 곳은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였을 것이다. 4악장의 가짜 피날레 뒤에 나는 히죽 웃었을 것이고, 다시 진짜 피날레를 시작해서 코다까지 마무리했다. 술에 취한 아침의 동아리방에서 누가 나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아마도 그 학기가 분명하다. 그 누군가가 어여쁜 신입생이라고 알려준 것은 과 동기 도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