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그해 우리는 비퍼, 그러니까 삐삐를 썼다. 나의 세 살 위 형은 재수생 시절 삐삐를 조르기 위해 거의 보름을 굶었다. 몰래 뭔가를 먹었을 테지만 어머니는 삐삐를 사주었다.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건 내가 속한 세대가 그랬다는 뜻 - 뒷주머니에 삐삐를 차고 포장마차(실내 포장 아니고)에 앉아 부풀어가는 엉덩이에 밀려 삐삐를 잃어버리고는 했다. 이태원 광고회사 신입시절 사수 격이었던 오 차장이 회상하기를, 진탕 마신 다음날 광화문에서 택시를 잡다가 사타구니와 엉덩이에 통증을 느낀 나머지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자신의 짧은 운명을 점쳤다고… 물론 알고 봤더니 그것은 거대하고 강력한 모토로라 비퍼의 진동이었다. 우리의 멋은 누군가 나의 호출을 받고 메시지를 듣기 위해 사서함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들리는 요즘의 컬러링 같은 음악 고르기였을 테다. 나는 굴드의 평균율 C장조 프렐류드 엘피를 녹음해서 사용했다. 그 스타카토가 제법 내 마음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호출 메시지로 들어가는 음악은 메시지 주인의 일상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삐삐를 통했다. 나는 대체 삐삐를 가지고 무슨 삶을 살았을까? 지금 막 떠오르는 건 햄버거 가게 위에 있던 타워레코드에서 번스타인의 말러 중에 소니 시절의 말러 5번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내 모습 정도이다. 아, 그리고 삐삐시절 신입생 여자아이를 몇 번 찾아다니며 만난 적이 있다. 삐삐시절이었으니까 그 아이의 집 앞에 가서 소주 냄새를 풍기면서 주접을 떨었다. 삐삐가 준 만용이었을까? 우리는 소셜메신저가 아닌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2층 동아리 방에서 뛰어내렸던가? 삐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있었고, 달리 또 삐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휴대용 전화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교수의 방에서 인터넷메일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북한과 폭염은 이 해에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은 폭염 때문에 죽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죽긴 죽었다. 그날도 아주 더웠다. 북으로 조문을 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입대했다. 매 순간 물이 그리웠다. 세상의 입자적 본질은 물에 있을 거라고 훈련장에 공급된 물을 마시면서 중얼거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