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노래

<봄> - 이소라

by 히피 지망생

제철 과일은 제철에 먹어야 하듯, 제철에 들어야 하는 노래가 있다. 이소라의 <봄>이 그렇다. 다만 이 노래는 제목에 함정이 있다. 봄보다 겨울에 들어야 더 좋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거짓말 한 스푼 보태면, 언젠가부터 겨울의 초입에 이 노래를 듣는 게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연례행사가 됐다. 거짓말 두 스푼 보태면, 붕어빵 없이 보내는 겨울은 (힘겹게) 상상할 수 있어도 이 노래 없는 겨울은 상상이 안된다. 거짓말 세 스푼 보태면, 나는 차가운 겨울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이 노래가 귓가에서 자동재생된다.

다시 말해, 나에게 겨울은 이소라의 <봄>이다.

(그나저나 불볕더위가 한창인 이때 이 노래를 소개하다니 시의성 무엇?)


그렇다고 겨울에만 들어야 하는 노래는 아니다. 지금처럼 바깥은 불처럼 뜨겁지만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울 때, 늦가을 떨어지는 낙엽에 마음이 심란해질 때, 간만에 내린 봄비에 마음이 촉촉이 젖어들 때, 언제 들어도 좋다. 앞에서 제철 노래라는 게 있다고 써놨지만, 어디까지나 특정 계절에 즐겨 듣는 노래가 있다는 뜻일 뿐, 사실 좋은 음악은 듣기 좋은 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들어도 좋으니까 좋은 음악이 것이다.


평소 나는 음악을 감정 증폭제로 활용하고 있고, 하여 음악을 듣는 그 순간의 감정을 증폭시켜 줄 '감정 카테고리별 플레이리스트'를 갖고 있다. 이소라의 6집 [눈썹달] 앨범은 '오늘따라 누군가가 그리운 어느 날'의 해안도로 밤산책용 BGM이다. 그날그날 그리움의 정도가 다를 뿐, 루틴은 비슷하다.



눈물은 왠지 봄보다는 겨울에 가깝고, 그래서 이 노래도 겨울에 들으면 더 좋다. 지금처럼 봄은 왔지만 마음은 겨울일 때 들어도 좋다. 역시 좋은 음악은 '듣기 좋은 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들어도 좋으니까 좋은 음악이 된 것이다.


1번 트랙 <tears>로 멜랑꼴리의 문을 열어젖히며 그리움의 빌드업을 시작한다. 3번 트랙 <바람이 분다>의 마지막 가사(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를 따라 부르며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을까, 감탄한다. 그렇게 그리움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다 보면 8번 트랙 즈음에는 법환 해안도로 입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법환 포구 앞을 지날 때 듣게 되는 10번 트랙 <봄>. 이 노래를 들어본 사람은, 가사를 읽어본 사람은 바로 눈치 챈다. 이 노래는, 제목은 봄이지만 겨울에 어울리는 노래라는 것을.


하루 종일 그대 생각 뿐입니다

그래도 그리운 날은 꿈에도 보입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모르는지

미련도 없이 너무 쉽게쉽게 헤어집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 오면

원망도 깊어져가요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또 기다릴 수 있겠죠

- 이소라의 <봄> 중



노래 전반에 흐르는 시린 겨울 감성과 따뜻한 봄 이미지와의 대비. 파랑과 초록의 그 선명한 대비는 늘 뜨거운 뭔가를 불러왔고, 끝내 마지막 두 줄에서는 눈물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앞의 가사들은 마지막 이 두 줄에 당신을 울리기 위함이었다는 듯, 마지막 두 줄을 부르는 이소라는 모든 걸 포기한 듯 나직이 읊조린다.


그대와 나 사이 눈물로 흐르는 강

그대는 아득하게 멀게만 보입니다


하필 이 가사가 들릴 때 즈음엔 법환 포구 앞바다가 눈에 걸렸다.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주는 잔잔한 바다는 보고 싶은 가족과 나 사이 눈물로 흐르는 강이 되었고, 가사에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내 몸 안엔 뜨거운 뭔가가 퍼지곤 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리움으로 데워진 내 피었을 것이다. 뜨거운 피가 온몸을 순환하다 눈물샘 근처에 닿으면 얼어있던 눈물샘을 녹였고, 눈물은 수위를 높여갔다. 더 이상 눈시울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결국 눈물이 되어 흘렀다. 왠지 그 장면은 봄이 오면 눈이 녹는다는 비유를 이미지로 나타낸 상징(그리움은 얼어붙은 눈물샘을 녹여 눈물을 흘리게 한다) 같았고, 나는 그때마다 생각했다. 역시 이 노래는 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노래라고. 스튜디오 앨범의 '소리'에 집중해서 들으면 그제야 들리는, 이소라의 들숨 소리에선 입김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고.


다행이라면 이때 흐르는 눈물은 슬픔의 눈물보다는 환희의 눈물에 가까웠다는 것. 다시 며칠만 기다리면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게,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그럴 때마다 그리운 사람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떠올라 뒤이어 흐르는 눈물의 3할 정도는 슬픔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리워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기다려도 그리워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건 얼마나 깊은 슬픔인가.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봄도 겨울도 아닌 여름에 이소라의 <봄>을 들으며 이젠 그때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과 함께 사는 와중에 글을 마무리하려니 마무리가 잘 안 된다. 아무래도 이 글은 쟁여놓았다가 올 겨울 그리운 사람이 생겼을 때 매듭 지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날이 푸르르니, 송창식의 <푸르른 날>을 틀어놓고 봄보다 더 따뜻한 방식으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야겠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푸르른 날>, 송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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