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는 있는 것 (1)
<나도 할 수 있는 생각>편은 이번 여행에는 있는 것 세 가지 중 첫 번째인 '새로운 사진'에 대한 이야기이며, 모기향과 호주편에서 결론 내린 '정직한 현재 사진 스타일 깨뜨리기'의 과정이다.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내 사진은 무척 친절한 편이다. 보통 두 가지 이상의 복잡한 이야기 없이 한 가지 이야기만을 전달한다. 또 사람들이 그 한 가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주기를 바란다. 이런 일방향적 전달 방식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비교적 일맥상통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불행하게도 그 이상을 원했던 친절한 나의 사진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잊혀만 갔다. 자세한 이유는 바쁜 여행과 흔한 사진편 참고.
작년과 재작년 서울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에게는 재미있는 제목이 있다. 왼쪽은 여름 퇴근길 파란 하늘에 떠있는 복스러운 구름과 유연한 가로등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은 '가로등 스푼, 구름 한 숟갈'이라는 유쾌한 제목을 붙여 주었다. 오른쪽은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적을 일정 간격으로 촬영한 뒤, 서로 반대 방향의 실루엣을 이어 붙인 사진이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은 'Human Conveyor Belt'라는 심도 있는 제목을 붙여 주었다.
친절한 인호씨가 보지 못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채워 주었다. 사진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 순간부터 작가의 것이 아니게 된다. 관람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답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다. 심지어 답이 없을 수도 있다. 마치 한 과목만 조기 교육시킨 부모처럼, 나 스스로 너무 한 가지만 국한하여 내 사진의 가능성을 좁힌 게 아닐까.
그동안 핵심만 명확하게 뽑아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화각을 좁히고 화면을 잘라 내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아예 한 가지 화각으로만 바라보았다. 더 넓게, 가능한 더 불친절하게. 평소에 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선뜻 확신은 없었지만, 왠지 이번 여행에서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Yarra River Promenade 야라강 산책로
첫째 날 세 번째로 야라강을 건널 때 해는 이미 넘어갈 듯했고, 그로 인해 그림자들이 사람들보다 길어졌다. 아래로 내려다본 야라강 산책로의 사람들은 각자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보통 한 명 혹은 둘 이상의 관계를 찾아 친절한 구도를 잡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냥 모두 담고 싶었다.
Chapel Street 채플 스트리트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정말 갑작스러웠고, 또 정말 세찬 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듯했고, 비도 곧 그쳤다. 따라서 거리에는 비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일상의 모습이 있어야 했다. 내 앞에는 빗방울과 맑은 하늘을 모두 가진 빨간차 한 대가 있었다.
Fitzroy 피츠로이 골목길
여행 출발 이틀 전 충동적으로 35mm 단렌즈를 구입하였다. 호주까지 줌렌즈와 단렌즈 2개를 모두 가져왔지만, 또한 충동적으로 여행 내내 단렌즈만을 선택하였다. 습관처럼 낙서로 가득한 골목길을 화면 전체에 채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오른쪽 산뜻한 색상의 친절한 문구가 보였다.
나의 사진은 조금 불친절해도 괜찮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왜 저렇게 안 이쁜 사진을 찍지'
관심이 안 가는 사진에 대해서 줄곧 해왔던부정적인 생각이 최근에는 이렇게 바뀌었다.
'주제 전달이 중요한 건지는 자-알 알겠는데, 시각적으로 끌리지가 않으니 좋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여전히 아름답고 완벽한 사진에 매력을 느끼지만, 단번에 이해되지 않던 사진에도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알고 나면 난해했던 기호들이 어느새 훌륭한 작품으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최근 머릿속 고민들은 주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앞으로 나는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는가. 나는 계속 흔한 인스타그램풍 사진이나 <일상의 나이테>와 같은 사진을 찍는 운명인 걸까. 고민하는 '단위'가 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고민으로 여기는 편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개별적인 것에 힘을 빼고 전체에 힘을 싣어야지. 다시 처음의 느낌처럼 찍어야지. 8년 전 생활관에서 사진 이론 책을 읽고 휴가 나와서 찍었던 그 한 장의 느낌처럼.
불완전한 사람인 내가 그동안 완전한 것만을 좇았기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가 동반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혼란스러운 상태 그대로 이어갔다. 더 자유롭게. 가능한 더 불완전하게. 평소에 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선뜻 확신은 없었지만, 왠지 이번 여행에서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Flinders Street Station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에서 바라본 시티 전경
한 달마다 마주하는 헤어 디자이너분이 '가장 호주다운 사진 한 장 찍어오기'라는 미션을 주셨다. 멜번에서 가장 호주다운 것은 무엇인가. 끝내 딱 맞는 피사체를 찾진 못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사진을 살펴보았을 때 첫째 날 가장 근접한 결과를 찾았다. 멜번의 뜨거운 공기에 놀랐던 나의 첫 느낌이었다. 주말에 이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그분은 어떤 생각을 할까?
Degraves Street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디그레이브스 카페 거리의 밤 풍경
첫째 날 앤디 워홀-아이웨이웨이의 전시를 보고, 멜번 시티 골목길을 걷고, 마지막으로 유레카 타워에 올라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칫솔과 면도기, 생수, 사과를 구입했다. 밤이 되었어도 디그레이브스 카페 거리는 낮처럼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때마침 거리를 가로막고 있는 폭스바겐 화물차의 유리창에는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의 모습이 비쳐졌다.
Richmond 리치몬드 어느 골목길
이것으로 아쉬울 것이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런 홀가분한 마음으로 리치몬드를 거닐었다. 다시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아마 다시 이 곳을 오는 일은 평생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둘러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런 상태로 바라본 빈 거리에는 어둡고도 밝은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Richmond 리치몬드 어느 상가
나에게는 여행 마지막 날이지만, 그들에게는 주말의 시작인 토요일 저녁. 여느 거리보다 유난히 이 거리는 정겨워 보였다. 마침 행복한 커플과 생각지도 않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던 터라 나의 공허함은 더욱 커졌다. 사람들을 피해 더 외진 곳을 향했다. 쇼윈도의 벌거벗은 마네킹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응시하였다. 그러자 그 속에는 내 모습이 있었다.
나의 사진은 조금 불완전해도 괜찮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노출과 구도는 늘 일정해야 해'
연작으로 계획된 이미지들은 항상 일괄적인 노출과 구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도 미리 계획했다. 더 치밀하게. 가능한 불일치하지 않게. 평소에도 계속하던 것이기에 선뜻 확신이 있었고, 왠지 이번 여행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계획과 일치되지도 않았고, 그로 인해 계획했던 구도와 노출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럼에도 결과는 계획보다 좋았다. 그래서 소제목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Port Melbourne Sunset Timelapse 포트 멜번에서의 두 번째 일몰 타임랩스
DoubleTree by Hilton Hotel Melbourne Sleet Timelapse 호텔에서 두 번째 수면 타임랩스
Brightion Beach Sunset Timelapse 브라이튼에서의 세 번째 일몰 타임랩스
DoubleTree by Hilton Hotel Melbourne Sleet Timelapse 호텔에서 세 번째 수면 타임랩스
위 영상들은 작년 가장 유용하게 사용했던 타임 랩스 작업의 연장이다. 하루 중 가장 역동적인 시간과 가장 정적인 시간을 나란히 배치시킨 작업이다. 그리고 아래는 이 작업의 과정ㅡ실수의 연속ㅡ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날, 유레카 타워 야외 테라스에는 생각보다 많은 바람이 불어 도저히 삼각대를 펼칠 수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와서 겨우 촬영을 끝냈지만, 알 수 없눈 실수로 인해 계획된 세팅 값이 틀리게 맞춰졌다. 계획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첫 번째 날의 어이없는 실수를 바로 잡으려고 두 번째 날엔 다시 한번 세팅을 확인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느긋하게 일몰을 즐기고 있었지만 무언가 또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번에는 다른 부분의 세팅 값이 또 틀려서, 또 다른 결과가 나왔다. 세 번째 날이 되어서야 그 어떤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계획대로 진행하였다. 호텔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정작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어야 할 세 번째 영상조차도 내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계획 자체가 엉터리였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이에 대응하여 수면 타임랩스도 원래 계획과 다르게 위치를 계속 바꿔가며 촬영하였다. 결과로만 본다면 계획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재미있다. 계획과 틀려버린다고 해서 결과마저 틀리지는 않다. 더 좋을 수도, 더 나쁠 수도 있는 그저 다른 결과가 되는 것이다.
'노출과 구도는 늘 일정해야 해'
연작으로 계획된 이미지들은 항상 일괄적인 노출과 구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가끔 작은 실수와 예상치 못한 우연들이 더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의 사진은 조금 불일치해도 괜찮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불친절함, 불완전함, 불일치함. 이것들은 사실 불필요한 걱정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나는 할 수 없다 혹은 나는 하면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나의 사진을 묶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작년 사진을 배우면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듯 이제 나의 닫혔던 사진도 조금씩 열어본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Antonio Carlos Jobim - Wave
작년 말 사진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여 호주 멜번을 다녀왔다. 나의 4번째 사진 여행은 재미있는 생각으로 시작하여 즐겁게 계획하고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싱가포르 항공과 더블트리 바이 힐튼 호텔을 제공받아 가벼운 마음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전 여행과 차이점이 많은 여행이라 시간이나 공간별로 엮지 않고 다음 4가지를 기준으로 여행기를 정리하였다.
이번 여행에는 없는 것
이번 여행에는 있는 것
이번 여행에도 있는 것
이번 여행에도 없는 것
이번 여행을 만들어 준 것
이번 여행에도 없는 것
이번 여행에는 있는 것
이번 여행에도 있는 것
이번 여행에도 없는 것
다음 여행에도 있을 것
2009년 제주도, 2011년 도쿄, 2015년 홍콩에 이어 2016년 호주 멜버른 여행도 역시 즐겁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언제가 될지 어디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다음 여행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여행 후 다시 시작된 일상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여전히 저의 인스타그램을 찾아와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