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자기가 못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한달매거진 Day 16: 당신에게 쉬운 일이 다른 사람에겐 쉽지 않았던 일은 무엇인가요? 많은 훈련을 하지 않고도 쉽게 배웠던 일은 무엇인가요? 의식하지 않고도 저절로 하게 되는 유용한 습관은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쉬운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자기 강점보다 약점에만 집중한다. 나에게 쉬웠던 일이 뭐가 있을까. 다른 나라나 다른 환경에 금방 적응하는 것일까.
9살 때 처음 도쿄에서 한국에 왔다. 스트레스는 전혀 받지 않았고 그저 빨리 한국어를 배워야지 싶었다. 한국어가 유창해진 게 나의 능력덕분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건 어릴 때였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은 뭐든지 금방 배우니까.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한글을 공부한 적도 없어서 한국에 오자마자 학교수업끝나면 속셈학원 가서 가나다라부터 배웠다. '묘'를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선생님이 설명해주시는데 그게 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일본 무덤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으니까 내가 알리 없지.) 학원 선생님도 설명해주시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것도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내가 완전 한국어 only인 환경에서 배웠으니 그렇게 빨리 배웠겠지 싶다. 학교에서도 담임선생님은 일기 쓰기를 일본어와 새로 알게 된 한국어 단어를 섞어서 쓰라고 배려해주셨다. 연세 많으셨던 선생님의 배려가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하다. 그렇게 내가 한국어를 잘하게 된 경로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명동에 있는 화교학교에 1년, 그리고 중국 선전(심천)에 5개월간 살게 되었다. 아빠 일 때문에 가게 된 거였는데 그 때도 별 생각이 없었다. '아 이번에는 중국어구나'같은 드라이한 느낌이랄까. 나이는 6학년이었지만 화교학교에서는 2학년 수업을 반년, 나머지 반년은 4학년 수업을 들었다. 한글과는 다르게 중국어는 배워야 하는 한자의 양이 어마어마하다.(세종대왕님 리스펙) 그리고 화교학교는 대만 학교로 번체자를 쓴다. 중국에서 쓰는 간단한 간체자와는 다르다. 반년간 2학년 아이들 1년 교재 한자를 다 떼고 다음 학기에 4학년 아이들반으로 월반해서 4학년 1,2학기 책을 반년만에 뗐다. 근데 웃긴 건 그렇게 하고 갔지만 막상 중국 현지에서는 간체자를 다시 배워야 했다. 말도 거의 못 했고 그냥 화교학교의 1년은 번체자 한자만 배운 일 년이었다. 중국 선전에서 2개월간 현지인 학교에 던져졌고 그때 말하기가 조금 트였다. 그래도 선전에서 쓰는 지방언어인 광둥어는 너무 어려워서 할 엄두도 안 났다. 그때 얄미운 반장 녀석이 광둥어로 나 못 알아듣게 씨부린 게 그렇게 얄미웠는데. 다시 생각하니 빡친다.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 보니 감사했던 건 번체자를 먼저 배우고 중국 선전에 가서 간체자를 배운 것이다. 간체자를 먼저 배운 사람이 번체자 배우기란 정말 힘들다. 어려운 거부터 배우면 쉬운 건 약간의 요령만 터득하면 되니 쉬웠다.
나는 그 당시 나보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수업을 들어도 별로 쪽팔리지 않았다.(고학년 언니와 잘 놀아줘서 고마워 그때 동급생 아가들아.) 그래도 처음에 내가 중국어는 잘 못했어도 수학은 잘하니까 아가들이 나를 무시하진 못했던 것 같다.(그럼 당연하지 언니는 이미 다 배운 거란다.)
쓰다 보니 내가 남들보다 쉬웠던 건 상황 적응력과 멘탈이었던 걸까. 나는 배움에 있어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별로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걸 숨기다가 들키면 그게 더 쪽 팔린거라고 생각한다. 모르는걸 제대로 알고 그걸 배우려는 자세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결국 언어는 실수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배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실수는 신경쓰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어가 어눌한 외국인을 비웃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남의 시선에 겁을 많이 먹는 거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구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비웃는 사람의 인성이 얄팍한 거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멘탈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남들보다 적은 것같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회복탄력성이 강한거 같다. 쓰다보니 내 강점이 참 마음에 든다.
P.S 웃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 하나를 들자면 나에게 남들보다 쉬웠던 건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다. 나만의 철학이 뚜렷해서 그런거 같다. 이 얘기까지하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생략한다. 다른 기회에 이 얘기도 할 수 있게 되면 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