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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May 28. 2024

모든 시간을 거슬러 너에게 갈게

내 손 안의 초록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워 이불빨래를 돌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새롭게 돋아난 초록 잎들이 마음을 들쑤셨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손 갓을 세우며 걷는데 드라마 속 대사가 맴돌았다.

‘모든 시간을 거슬러 너에게 갈게.’
 
2003년 봄, 808 버스에 올라탔다. 대학생처럼 보이려고 든 파일을 품에 안고 무게 중심을 잡으며 빈 좌석에 앉았다. 버스는 1시간 20분을 달려 종점에 도착했다. 기다랗게 늘어선 줄 끄트머리에서 다시 또 버스를 기다렸다.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 창밖으로 펼쳐진 초록 정원을 보며 매일 여행하듯 학교로 갔다.

학교는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본관 앞으로 4차선 도로가 뻗어있고, 양가로 왕벚꽃 나무가 서있었다. 연분홍 꽃비가 날리면 바지 밑단이 해지도록 곳곳을 누볐다.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치는 훈남 선배는 없었지만, 대학 생활은 하루하루가 이벤트였다. 공강 시간에 낮술 마시기. 과방에서 수다 떨기, 발표준비 한답시고 연애 상담해 주기. 소문난 학식 먹으러 가기. 지나가는 선배에게 밥 얻어먹기 등 먹고 떠들고 마시기 위해 학교에 갔다.


“안녕하세요. 20년 전통을 자랑하는 자원봉사 동아리 굿윌입니다. 저희는 매주 2회 이상 자폐 학생이 다니는 특수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합니다. 아이들을 직접 만나며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고, 학교 선생님들과 졸업한 선배님들과의 관계도 끈끈합니다.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교양수업이 끝나자마자, 남다른 포스의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동아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봉사 활동 횟수를 자랑하며, 각오한 자들만 들어오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비장한 표정과 말투에서 새어 나온 뜨거운 열정 때문일까. 덩달아 내 가슴도 뛰었다. 수시 전형으로 일찌감치 합격 통보를 받은 난,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어디도 섞이지 못했다. 나를 옭아매는 소속감이 간절했다. 흔쾌히 각오한 자가 되리라 마음먹고 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테스트에 통과해야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뭐야, 대체 이 집단의 정체가!’
 

테스트 날이 다가왔다. 동아리에 지원한 아이들이 모였고, 회장 선배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1단계 체력 테스트, 2단계 춤 노래, 3단계 술 마시기, 모든 미션을 통과한 사람만 최종 합격입니다. 우선 **공원까지 오래 달리기를 할 겁니다. 걷는 건 인정 안 되니까 무조건 뛰어서 갑니다. 시작!”
곧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골 같은 묵직한 소속감은 오기와 깡으로 다져진 건가. 20년 전통은 국밥집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었다. 2학년 선배들은 당한 만큼 돌려주겠노라는 눈빛으로 눈을 부라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그들의 타깃이 되기로 했다. 토가 쏠리도록 달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공원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지하 호프집에서 소주와 맥주를 코를 잡고 들이켰다. 화장실을 드나들며 비우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터득했다. 머리는 땀과 술로 떡 지고, 혀는 의지와 상관없이 꼬부라졌다. 지원자 중 몇몇은 하나님을 찾으며 사라졌고 나를 포함한 4명만이 남았다. 여자 셋, 남자 하나. 그렇게 우린 동아리 동기가 되었다.


동기들과 신입생 환영 모꼬지에서 선보일 장기 자랑을 준비했다. ‘살짝 미치면 편해질 거야. 부탁한다. 동기야.’ 유일한 남자 동기에게 수모와 수경, 형광색 쫄쫄이 타이즈를 입혔다. 나머지 셋은 나란히 서서 칫솔에 치약을 묻혀 ‘치키치키차카차카초’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선배들은 배를 잡고 나뒹굴었고, 분위기 탄 우리는 얼굴에 서로 치약을 묻히는 퍼포먼스까지 강행했다.


이후 우린 동기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불러 다녔다. 졸업한 선배와 학교 선생님이 부르면 나가서 술을 마셨다. 술독에 빠져 1년이 순식간에 흘렀고, 신입생을 뽑을 때가 됐다. 동기들과 전략을 세웠다. 술을 잘 마실 것 같은 애, 노래를 잘할 것 같은 애, 집이 가까운 애 등 정보를 입수해 주도면밀하게 그들을 유혹했다. 그중의 몇은 넘어왔고 몇은 지조 있게 거절했다. 3차 테스트가 끝나고 지하 호프집에 쓰러져 있는 후배 모습에서 그때의 내 모습이 겹쳤다. 내가 받은 사랑과 관심을 고스란히 물려주며 ‘선배’라는 호칭에 점점 익숙해졌다.


어느덧 4학년,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봉사 활동을 나가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학교는 반마다 특수교육 실무원을 배치했고, 역할이 줄어든 만큼 책임감도 줄어들었다. 그 사이 연필 들 힘만 있으면 합격했던 전례와 달리 임용고시 경쟁률은 해를 거듭할수록 치열해졌다. 한낱 수험생으로 전락한 난, 후배들의 안위를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나의 20대 초반을 불태웠던 동아리는 그렇게 몇 년을 못 버티다 해체되었다.
 
꽃 보라가 그때의 시간에 내려앉았다. 가장 찬란했던 네 번의 봄, 잊고 살던 존재와 이야기가 그때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퍼석한 마음 위로 떨어진 분홍 잉크 한 방울이 자꾸만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아직도 헤매고 있지만, 지나간 시간의 내가 짠하지만은 않다. 모든 시간을 거슬러 갈 순 없어도, 같은 길을 바라보며 함께 울고 웃었던 그들을 오래도록 떠올리고 싶다. 내 손 안의 초록이 그들에게도 변치 않길 바라길 바라며.




2024.5.28 마음자국

선재를 보낼 준비를 하며




<우리말 풀이>

*손갓 - 햇살의 눈부심을 막고 멀리 보기 위하여 손을 이맛 전에 붙이는 갓

*모꼬지 - 놀이나 잔치로 여러 사람의 모임

*꽃보라 -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많은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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