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블랙커피가 맛있어질 때

by 해처럼


커피를 처음 마신 건 막 스무 살이 된 무렵 학교 구석의 기이한 소음을 내며 존재감을 표현하던 커피 자판기 앞에서였다. 설탕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 밀크커피였는데 일회용 종이컵에 적당량 담겨있던 갈색 음료의 달달함에 반해버렸다. 그저 단맛 만을 무기로 어필하던 주스나 탄산음료와 달리 커피의 달달함은 달랐다. 쓴맛의 베이스 위에 얹힌 달콤함이었기 때문이다. 훅 다가온 커피의 세계에 매료된 나는 그 후로 긴 시간 동안 '단 커피'가 아니면 커피라는 음료를 입에 댈 수 없었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나의 앞에 펼쳐질 미래가 그 커피처럼 달달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을 품었던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권한 블랙커피를 마시고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앗, 맛있잖아' 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것은 더 이상 쓴 맛이라고 할 수 없었다. 쓴맛이지만 쓴맛이 아니었다. 그저 익숙한 맛이었다. 어느새 내 인생은 달의 뒷면을 보고 말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 미각이 '쓴맛'에 익숙해져 버린 것뿐이었던가.



©2021 해처럼




고통의 경험이라는 것이 커피의 쓴맛과 단맛처럼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고통은 확실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약, 중, 강의 정도가 체험을 통해 미묘하게 구분된다. 최고조의 고통이 기억에 새겨지면 그보다 덜한 고통은 그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즉 상대적으로 덜 쓰게 느껴지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건 심리적 고통이건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아픈 것이 주삿바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주삿바늘쯤은 친절하게 느껴진다. 큰 고통이 자잘한 고통을 집어삼키며 맷집을 키우는 것이다.



나는 SF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중 '에일리언 시리즈'를 특히 좋아했다. 그 괴기스러운 분위기와 당장이라도 끔찍한 것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를 온몸의 피부로 느끼는 오싹한 쾌감을 즐겼다. 그것을 쾌감이라고 해야 할지 고통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현실의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고통을 픽션의 공포로 치환하여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하여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와 현실의 공기를 들이마시면 그래도 현실이 견딜만한 것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공포영화를 즐겼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1 해처럼




사랑이 그러하듯 나에게 찾아온 고통도 그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이었든 시간에 의해 혹은 또 다른 고통에 의해 변색된다. 농도 역시 서서히 연해진다. 많은 사람들의 경험칙에 기반한 이러한 사실에 우리는 희망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지금 내 머리맡에 머물고 있는 고통에 겁먹지 말기로 하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냥 가만히 그것을 견디며 버틸 힘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쓴 커피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목구멍을 넘어가듯 어느 순간 담담하게 마음의 목구멍에 흘려보낼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 소멸할 때까지 ‘즐거움’, ‘행복 같은 상태를 추구하며 사는 듯해도 실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하루하루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너무 마이너스적인 생각이려나.








©2021 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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