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말을 빠뜨리는 어른들

인따르시아 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신박한 교칙

by orosi

불운한 아이였다.

동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아이를 가여히 여겼다. 이제 막 반항을 꿈꾸던 열두 살 아이는 그날 홀로 겪어낸 고통을 그 후로도 쭉 함구하고 살았다.


토해내려 해도 보통은 잘 되질 않았으니까. 도리가 없었을 거다. 병명을 알 수 없으나 그 탓에 호흡이 잘 되지 않는 일상이 기어이 시작됐다.



난 갈 거고
이제 다시 이 집에 안 올 거다.





잘 있으라는 말을 빠뜨리셨다.

깜박했다기보다는 잘 있기 힘들 거란걸 아셨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난 그분에 대해서 만큼은 담백한 감정을 갖고 살아왔다. 어쩜 이리도 현명할까 싶어 여러 차례 스스로 대견해하다보니 벌써 40대가 되었다. 그 유리 같던 소녀가 쿨하게 돌아섰던 엄마(쓰면서도 참 낯선 호칭인데 아빠는 아니니까 어쩌겠나)처럼 40대 아줌마가 되어있다.

똑같이 딸 둘을 둔 평범하지만 종종 단호한 엄마가 되어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학교를 마치고 배가 아파 화장실 변기에 앉아 대변누기를 시도하고 있던 순간.


그 원초적인 상황도 기다려주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를 생략하면서까지 급히 가야 했을까.

그렇게 참 간단히 떠났다.


나 못지않게 찬 기운을 타고 난 사람이었나 보다.

본래 타고나기를 냉정하게 타고났다기에는 280여 일을 나와 언닐 품었을 테고, 애써 낳았을 테고, 11년이 넘도록 키워내지 않았나.

엄마라면 응당 사랑이 넘쳐야 함을 강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저 두 문장에 혹시라도 얕게나마 원망이 묻어났으려나 하는 염려에 잠시 숨을 고른다.


명주초등학교 6학년 3반 교실에 이제 나는 야무진 반장이 아니라 표정을 잃은 윤미가 되어 있었다. 살다 보면 의지로는 도저히 어쩌질 못할 정신으로 겨우 연명하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겠지.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씩씩하게. 다 잊고. 힘내서.

뭐 이따위 격려로 괜찮기를 선택하며 살기엔

많이 어렸지 않나 싶다.


점심시간이면 후관 소각장 뒤로 가서 숨죽여 울던 아이는... 글쎄, 너무 슬펐을까?

아마도 오래도록 놀란 탓일 거다. 그것도 맞고, 이것도 맞다.


내가 그 아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젠 아빠를 빼면 하나뿐인 피붙인데, 그런 언니마저 함께 떠났다. 정말 가지가지한다.

모진 사람들.


가려면 영영 가버릴 것이지 어째서 가고 오기를 반복하며 내 마음에 수시로 생채기를 남기나.

나는 그렇게 두 여자를 온 마음 다해 미워하게 됐다.

매일 나란히 40분. 근래 아이들이라면 참 멀기도 했을 등하굣길을 함께 오가던 우리 언니.

"아 진짜! 저 인간만 없으면"하며 심술을 냈던 걸 몰래 후회한 것도 여러 날이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사서후회(사서고생이랑 뭐가 다른가)하며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몸은 크는데 마음은 따라올 줄 몰랐다.



이 녀석아! 내 손 좀 봐라.
아빠 손은 개 손만도 못하다.
새벽 4시면 나가서 아빠가 어찌 목숨 부지하고 사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


중학교에 갓 입학하고 이제 겨우 3월 말. 신기하게도 엄마 없는 애. 티가 났나 보다.

교복치마에 남색인지 회색인지 알 수 없게 바랜 검정 양말이 화근이었다.

싸가지를 타고나지 못한 몇몇 친구들 탓에 없던 물욕이 감히 났다. 그 당시 강릉은 두발 제한은 둘째치고 양말모양까지 더럽게 제재가 심했던 아주 골 때리는 지방이었다.


인따르시아 양말 사주세요.
시내 못 가시면 그냥 2800원이라도.
저 주세요.
(돈 맡겨놓은 양 뻔뻔한 말투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꼭 거기꺼 신어야 한댔어요.

그 당시 여중생들 사이엔 이상한 양말바람이 불었다. 무지 2800원, 고급 3600원



일찌감치 철이 든 줄 알았던 딸이 심히 실망스러웠으리라. 아니, 브랜드 운운하는 딸을 딱해하기보단 본인처지가 더 기구하게 여겨졌을 아빠다. 아빠의 거친 손을 누구보다 눈여겨보고 있었고, 누구보다 깊이 슬퍼하고 있었는데... 터진 입이라고 한다는 말...하고는!

미거 하기 짝이 없었다. 후회한다.

그때의 아빠가 여전히 그립다. 요즘 부쩍 더 한 걸 보면 철이란 남자들만 늦게드는건 아닌가보지.




동네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가엾은 여자아이는 다행히 잘? 자랐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넘어야 했던 가파른 봉우리, 봉우리 덕에 삶을 들어 올리는 근력이 탄탄히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수시로 숨이 찬 순간이 많았기에 어찌 견뎠나 그때의 내가 안쓰럽다.




아빠가 못 갈 거야.
시간이 되면 아마... 이모할아버지, 이모할머니가 가시지 않을까 싶네.



어김없이 분주했을 새벽 4시. 자고 있는 딸 이마 맡에 대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이제부부도 아닌데) 아빠도 종종 해야 할 말을 빠뜨리곤 했다.

졸업 축하해
(듣기를 바랐으나 듣지 못한 한 마디)


어디 가져다 쓸데가 당췌 없는 강원도 남자지만, 이 정도 말이 그리 어렵진 않았을 텐데. 눈물이 날까 싶어 마음속으로만 하셨을 거라 믿는다.


그야 그렇다 치지만 할머니도 아니고, 명절 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눌 법한 간지러운 사이. 이모할아버지 내외가 웬 말이냔 말이다.


잠잠결임에도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홀로 졸업식을 치르는 게 낫나, 아니면 꿩대신 닭이라 치고 두 분이라도 오셔서 아무도 관심 없을 13살 아이, 체면 살려주는 게 낫나. 고민은 했지만


어차피 오고 말고는 어른들의 결정이라 생각을 멈췄다.


초등학교(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는 해에 졸업한 역사에 남을 졸업생이라 하셨다. 역사는 무슨. 웃기지만 정확하다. 저렇게 말씀하셨다. 교장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몇 안 되는 예의 바른 학생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초등학교 졸업식날 난 참 예뻤는데 증명해 보일 길이 없다.(웃음) 그 흔한 기념사진 한 장 없어 아쉬울 때가 많다.

눈도 포근히 운동장 가득 덮어줬는데. 그뿐인가. 가끔 와서 나를 측은히 안아주던 막내삼촌 애인, 수경언니는 몇 안되는 따뜻한 어른이었다. 언니가 사 준 하늘색 옷도 꽤나 잘 어울렸는데...


사진을 한 장 찍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 나는 남문동에서 새로 이사 간 포남동까지 쌓인 눈 위를 꾸역꾸역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족히 1시간 반을 걸어 돌아온 집엔 꽃다발은커녕 한 줌 온기도 없었다. 이런 날은 보일러 좀 틀지. 현관문 밖이나 안이나 매 한 가지로 냉기가 돌아 '볼 빨간 졸업생'은 DJ.DOC의 <다 지난 얘기지만>을 반복해 들었고, 울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특별한 날이라 조금은 길게 울었다면 기억했을지 모른다.


대부분 내게 어린 시절이라 함은 낱개낱개 기억의 편린들로 구석탱이 어딘가 박혀있다. 그날의 졸업식을 포함해 3가지 정도의 섬세한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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