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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Oct 27. 2020

길, 감각과 사색이 태어나다

길을 탐험하다-1

이탈리아 도시들의 지도를 보면 길은 좁고 광장은 작고 밀도가 빽빽해 숨통이 콱 막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막상 길을 걷다 보면 로지아(Loggia), 포르티코(Portico) 같은 회랑의 비워진 숨구멍들이 길과 광장을 확장해 도시는 밀도를 이겨내고야 만다. 그래서 걸으면 걸을수록 지도의 한계를 깨달아 덮어버리게 된다. 대신 도시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말하기조차 평범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길’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길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장소들을 연결하는 줄기, 핏줄, 척추와도 같아 다른 장소들처럼 그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길에 나타나는 특성을 기준으로 길과 길 주변의 장소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



#1. 그곳을 거쳐간다.

BGM # Moonchild | Cibo Matto


구도심, 신도심 사이 성벽의 일부.
구역과 구역 사이를 구분하고 연결하는 고리.
하나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 입구.


수없이 많은 통로를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친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통로를 지나며 무엇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는가.

출발과 목적지 사이에 있는 모든 루틴 중에서도 ‘그곳을 거쳐간다’는 감각은 매우 강하게 남는다.

그 감각을 이용해 사람들은 이곳에 역사와 경계, 입구의 의식을 심어둔다.

어딘가 지나갈 때, 경계를 넘을 때의 통과 의식처럼 이곳을 지남과 동시에 도시 안에, 동네 안에, 골목 안에 속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안에 속한 채 일시적이어도 일종의 공감과 공유를 경험하게 된다.

통로는 길의 폭과 방향, 성격이 달라지고 재료가 바뀌고 줄기가 나눠지고 환경이 바뀌는 그런 계기가 되는 전환점과도 같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장소들이 없다면 세계는 그저 비슷한 모습으로 연결된 재미없는 곳이 되거나 뚝 끊겨 단절된 풍경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의 전환점과도 같은 장소가 필요하다. 목적에 따라 스케일과 형태가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장소를 대하고 다루는 방식에 따라 장소의 아이덴티티는 점점 명확해져 간다.


우리는 그곳을 거쳐간다.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 의식과 감각이 쌓여간다.



#2. 길에서 말라가를 경험하다.

Sedella, Malaga, Spain _ BGM # M.A.Y. In The Backyard | Sakamoto Ryuichi


경사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그재그로 길을 길게 늘이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가장 쉬운 해결책은 세계 이곳저곳의 골목 풍경에서, 원시적인 주거와 같은 곳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딘가에서 본듯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그 각각의 다름이 존재하는 것은 장소의 아이덴티티를 반영함에 기인할 것이다. 그래서 다름을 이해하면 그곳을 알게 된다.

이곳은 스페인 말라가의 골목 한복판이다. 안달루시아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말라가의 지형은 도시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 사계절 내내 쾌적한 더할 나위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산과 지중해 사이의 가파른 땅 위에 난 지그재그의 길은 햇빛을 반사하는 흰 벽의 집 사이로 유유히 흘러내려간다. 그리고 오랜 시간 머물다간 이슬람의 건축과 문양들이 길을 따라 곳곳에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있다.


특별히 뭔가를 보기 이전에 길을 걷는 것만으로 우리는 말라가를 경험하게 된다.



#3. 틈과 같은 길을 걷다.


Morocco & Patmos Island, Greece _ BGM # Jeux D’eau | Andre Laplante


건물로 둘러싸여 숨이 막힐  좁은 모로코의 골목.
모서리가 잘려 나간 자리가 사람들을 여유롭게  준다.
그곳에 피어나는 모서리의 돌기(Blooming edge).
불편함을 해결하는 과정에 이슬람 장식이 자연스럽게 스며있다.


아슬아슬하게 골목 사이가 벌어졌다 좁혀지고를 반복하는 그리스 어느 도시의 길.

독특한 프로필로 이루어진 사이의 풍경 속에서 이슬람의 실용성에서 비롯된 장식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런 틈과도 같은 골목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지나칠 때 누군가는 양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빛을 주고받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골목의 스케일에서 비롯되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동네 이곳저곳의 골목들로 이어져 사람들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이웃이 된다.


길의 탄생과 함께 부여된 숙명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며 지속되기도 하지만 건물이 하나 늘어나고 사라지는 변화에, 거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루고 미루다 이뤄지는 개발에 의해 길은 자라나고, 모습이 바뀌고, 존재가 사라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길은 사람에 의해 때론 자연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존재이지만,  안에서 우리는 나아가고 잠시 멈추고 방향을 잡고 오르고 내리며 길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이 만든 다양한 모습의 길에서
그 의도를 뛰어넘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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