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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뻔펀한 홍사장 May 02. 2024

나는야 손님의 효자손

소머즈를 아시나요?

남편은 아토피성 피부건조증이 있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이 자주 가렵다고 해서 가게에는 두 개의 효자손이 걸려 있는데, 내가 있을 때는 꼭 직접 긁어달라고 한다.
가끔은 귀찮지만 사소한 섬김이 남편을 채워주는 사랑의 언어이니 얼마든지, 언제든지 마음을 담아 긁어주게 된다.


어느 날인가, 남편의 등을 긁어주고 있을 때 마침 손님이 들어오셨다.
"아, 뭐야~ 애정행각은 집에서나 하라구요."
단골손님은 부러움 섞인 말투로 우리 부부를 놀렸고, 우리는 질투 나서 그러시는 거냐고 눙치며 웃었다.


간간이, 손님들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드려야 할 때도 있다.
(이곳을 빌어-괄호 안의-마음의 소리도 적어본다.)


뭘 주문해야 맛있게 먹을지 추천해 달라고 할 때.
(지금 만석이라 일일이 설명해 드릴 시간이...ㅠㅠ)
튀김옷을 안 입히고 새우튀김을 먹고 싶다고 할 때.
(튀김옷을 안 입히고 새우를 튀길 수는 있어요. 그런데 수분이 날아가서 쪼그라들고 딱딱해지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전골에 들어가는 우동사리를 반만 넣어달라고 할 때.
(우동사리는 꽁꽁 언 냉동면이에요. 칼로 자르기 어려우니 반만 드시고 남기셔도 돼요.)
짬뽕 국물을 엽떡보다 맵게 만들어 달라고 할 때.
(그렇게 해 드렸는데, 못 드시고 원망하는 손님을 너~어무 많이 봤어요.)
홍합어묵탕을 주문하시고는 홍합만 끓여달라고 할 때, 또는 홍합은 빼고 어묵만 끓여달라고 할 때.
(오늘 홍합/어묵이 간당간당한데 우짜지...)
마요네즈가 들어가는 메뉴는 먹고 싶은데, 마요네즈 알러지가 있으니 어떡하면 좋겠냐고 할 때.
(손님...?! 저야말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까다로운 요구사항에 주방은 난색을 표하지만,

남편이나 나나 정말 안 되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주문은 맞춰드리려고 한다. 그게 마음이 편해서.

테이블이 좀 빠지고 한가해지면 남편과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런이런 주문이 있었다고, 저런저런 주문을 만드느라 수고했다고.
이십 년 넘게 요식업에 종사했던 남편이 받은 가장 곤란한 주문은 바로 김치 없는 김치볶음밥이었다고 한다.
김치볶음밥의 맛은 먹고 싶은데, 씹히는 김치는 싫다나? 그래서 김칫국물로 간을 맞춰 어떻게든 내 드렸다고 하고, 손님은 맛.있.게. 드시고 가셨다는 해피엔딩.


홀을 담당하는 내가 유난히 잘하는 게 있는데,
단골들의 취향과 니즈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시원하게 긁어드리는 것이다.

창가자리를 좋아하시는 손님.
물티슈를 두 개씩 사용하시는 손님.
생맥주 잔에 소주를 따라 드시는 손님.
탕수육엔 꼭 소금후추를 찍어 드시는 손님.
기본 안주 번데기를 곱빼기로 좋아하시는 손님.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한 종지씩 드려야 하는 손님.

저런, 오른손을 다치셨네, 포크도 같이 드려야겠다.
번데기를 안 드시는 손님께는 견과류를 챙겨드려야지.
저 손님은 생맥주 거품을 싫어하시니 조심해서 잘 따르기.
어린 자녀와 함께 오신 손님께는 집게와 가위를 갖다 드리고.
저분은 계란후라이 반숙, 저분은 완숙. 아, 저분은 반완숙이었지.
식사에 나오는 우동국물을 좋아하시는 손님께는 두 그릇을 챙겨드리는 걸로.
저 손님은 설탕토마토에 설탕을 많이. 그 옆 손님은 설탕 살짝, 아주 살짝만.

띵그렁~ 아, 이건 젓가락 한 개 떨어진 소리.
인터벌로 띵그렁 거렸으니 두 개 떨어진 소리.
조금 더 둔탁한 이 소리는 숟가락이 떨어진 소리.
손님이 나를 부르기도 전에 딱 맞게 갖다 드릴 때 자주 듣는 소리는, "와~ 사장님 소머즈예요?".


가끔은 눈치와 센스라는 효자손도 사용한다.


"누나, 진짜 오랜만에 왔죠? 저 작년 말에 여친과 헤어졌어요."
이모보다 누나가 낫지 않냐며 서글서글한 미소로 친근하게 대해주시던 손님께는, 부담되지 않을 만큼의 위로로 토닥여 드린다.


'앗~ 저분은 (또!) 남친/여친이 바뀌셨네.'
"드시던 걸로 드리면 되죠?"라고 평소처럼 살가운 인사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빛의 속도로 파악해야 한다.
업무상 고객 비밀유지 의무는 바로 이곳, 뻔뻔에서도 잘 지켜지고 있다.

때로는 효자손이 아니라, 효자 노릇도 하게 된다.


가게 입구에는 양 옆으로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쉬었다 가시는 할아버님이 계시다.
혹여 지나가지 않으시면 오늘은 안 오시나 궁금하기도 하고 때론 걱정도  정도.
돌돌이를 끌고 지친 다리를 의자에서 잠시 풀고 가시는 분들.
우리 가게 앞에서 장바구니가 찢어져 당황하신 어머님께는 비닐을 챙겨 드리기도 하고.
지나가다 물만 한 잔 청하는 분께도 흔쾌히 갖다 드린다.
"저, 화장실만 좀 사용해도 될까요?", 오브 콜스~
(근데 그때 그 아저씨! 두루마리 휴지는 왜 통째로 가져가셨나욧?)


어쩌면 작고 사소한 행동이지만,
손님이 필요를 요청하기 전에 눈치껏 챙겨드리는 행동혼자 뿌듯함을 느끼는 편이다.
(알아주지 않으셔도 괜찮고, 알아주시면 더 힘 나고.)

번화가도 아니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작은 주점이지만,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맛있게 드셨다고 하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시는 것이 우리 부부의 가장 큰 보람.

만 원짜리 메뉴라고, 만 원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내가 노노.
호텔 라운지 같은 편의를 제공해 드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분 좋은 미소와 적절한 태도로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

뻔뻔하게 맛있고, 뻔뻔하게 즐거운 공간으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싶다.

나는야,
손님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주는,

효자손이다.

오후 5시의 주인공_ⓒ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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