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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감자 Apr 15. 2022

옛날 아빠, 지금 아빠

가장의 무게를 아내에게 가볍게 토스! ep.10


아내는 회사로, 아이들은 학교로 보내고 난 후의 어느 한가한 오후, 오늘은 괜스레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다. 자기 계발이라도 하던가, 운동을 하던가, 하다못해 집이라도 깨끗하게 청소를 하던가 해야 하는데 그냥 힘이 빠져 소파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이런 날이 자주 온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이럴 때에는 나를 자책하기보다는 이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그래, 오늘은 애들이 올 때까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겠어.라고 쓸데없는 다짐을 하고 넷플릭스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검색하기만 십여분이 지나자 '미래일기'라는 콘텐츠가 눈에 띈다. 생면부지의 오키나와의 젊은 여자와 홋카이도의 젊은 남자가 제작진이 시키는 대로 데이트를 즐기면서 이들이 사랑에 빠지는가를 관찰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오오, 재밌겠다! 이거다! 라기보다는 7년 전에 갔었던 오키나와의 풍광이 그리워 선택했다. 예상대로 내용은 그다지 재밌진 않았지만 하얗게 보일 정도로 뜨겁고도 깨끗한 오키나와는 역시 대단히 멋있어서 예전의 좋았던 여행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나기 전 날, 턱수염을 멋있게 기르고 있던 남자는 "역시 여자는 수염 있는 남자를 싫어할 거야."라며 한치의 망설임 없이 수염을 잘라버린다. 그렇지, 당연하지. 넌 수염 안자르고 그대로 나갔으면 바로 차였을 거야. 세상에 수염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어! 너 제법 똘똘하구나.라고 그의 결단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대망의 첫 데이트 날,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게 웬걸, 여자는 수염 있는 남자를 좋아한단다. 남자는 한 방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있고, 나도 동시에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다. 세상에, 수염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이거 일본이라 그런 거겠지? 일본에는 수염 기르는 남자가 많잖아. 우리나라에도 적용시키기에는 좀 어려울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거울 속의 나를 보며 괜히 턱을 주욱 내밀어 수염을 쓰다듬는다. 남자다워 보이기는 하는데.. 역시 그런가? 멋진 건가?



친한 지인들에게 항상 듣던 얘기가 있다. "넌 심심하게 생겼어."라거나, "넌 얼굴에 특징이 없어." 심지어는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나온다면 절대 널 찾지 못할 거야." 그렇다. 예전의 나의 외모는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 평범의 극치였다.(그렇다고 지금의 외모가 주연급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얼굴에 특징이 없이 심심하게 생긴 게 머리숱도 적은 데다가 피부도 하얘서 영 볼품이 없었다. 회사를 나오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친구가 "이번 기회에 수염을 길러보는 건 어때?"라는 제안에 지금의 내 평생 동반자, '수염'을 만났다. 수염을 기른다고 해서 얼굴에 특징이 없이 심심하게 생긴 게 머리숱도 적은 데다가 피부도 하얘서 영 볼품이 없는 나를 완전히 변신시켜줄 리 없겠지만, 적어도 머리숱이 없는 것을 수염으로 커버해주기도 하도 얼굴에 특징이 하나 생겨 사람들이 나를 잘 알아보고 기억하게 되었다. 대단히 만족한다.


지금은 콧수염과 턱수염만 3~4mm 유지하고 있는데  수염 스타일을 찾기 위해서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라인까지도 같이 길러보았는데 라인은 숱이 적어 지저분해 보이고, 콧수염만 길러보니 이건 거의 일제강점기 친일파 같은 간신배 느낌이고, 턱수염만 길러보기도 하고 엄청 길게도 해보았는데 지금의 수염 스타일이 가장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이제는 이렇게만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귀찮아서 수염을  깎는  아니라 나름  부리는 거라고요.


하긴 요새는 그루밍족이라고 해서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도 바버샵이 동네마다 들어서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제품들도 봇물처럼 늘어나고 있다. 멋지게 포마드를 발라 윤기 나는 머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고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포마드부터 수염 관리 제품까지 그루밍 제품들이 다양하게 팔리고 있고, 클래식을 쫓는 사람들은 굳이 일자 면도기를 이용해 거품을 잔뜩 내어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수염을 깎는다. 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의지는 없어 작은 트리머를 하나 구매해 탭을 끼워 원하는 길이로 밀어버린 후 라인을 살짝 정리하는 정도이다. 시간 들여 멋 부리는 남자들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멋진 남자들이 늘어난다는 건 싫지 않은 일이다.

 


아들과 자기 전에 누워서 핸드폰의 예전 사진첩을 찾아보면서 낄낄대고 있는데 회사 다닐 때의 나의 모습이 나왔다. 허연 피부에 새까만 뿔테 안경을 끼고, 머리는 언제 잘랐는지 지저분하게 자라 있고 배는 볼록 나온 영락없는 외모는 일찌감치 포기한 직장인의 형색이다.

"어! 옛날 아빠다!"


"옛날 아빠가 뭐야? 그럼 지금 아빠는 뭐고?" "수염 없던 때가 옛날 아빠지." 그 표현이 너무 귀엽고도 웃겨 또 둘이 낄낄대다가 조심스레 묻는다. "흠, 그럼 옛날 아빠가 멋있니? 지금 아빠가 멋있니?" 두근두근 멋진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역시나 아들은 쉽지 않다. "멋있는 건 모르겠고 지금 아빠가 조금 더 나아." 그래도 기대한 대답의 근사치까지 가주어 고맙다, 아들아.


딸과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픈 허리 때문에 집 밖을 아예 못 나가고 침상생활만 두어 달을 할 때가 있었는데, 수염 정리가 너무 귀찮아 다 밀어버린 적이 있었다. 한동안 나갈 일도 없는데 뭐하러 수염 정리를 하고 있담. 하면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수염을 밀어버린 것이다. 이 날 저녁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은 옛날 아빠를 마주하게 되었다. 딸이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니 딸은 옛날 아빠를 처음 본 것이다. 나름 충격적이었는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이상해~ 이상해~"하며 도망을 다니는 딸을 붙잡으며 물어보았다. "수염 있는 게 멋있어? 없는 게 멋있어?" 나의 사랑하는 딸은 역시 내가 기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당연히 아빠는 수염이 있어야지!!" 딸에게는 아빠는 그냥 수염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어쩐지 가끔 유치원에 데리러 가면 유치원 친구들이 몰려들어 동물원의 동물을 가리키듯 날 보며 "털보 아빠다! 털보 아빠다!" 하면서 시끄럽고 딸은 옆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알지?라고 생각했는데 딸이 유치원에서 우리 아빠는 털보라고 떠들고 다니는 모양새이다. 아빠가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고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수염을 기르는 남자에 대한 선입견 자체가 없다.


엇, 혹시 '미래일기'의 여자의 아빠도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수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수염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일본과 우리나라의 문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수염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죄다 아빠들이 수염이 있었던 것인가? 취향의 차이가 어릴 적에 보고 들은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럼 우리 딸은 커서 수염 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건가? 나도 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왠지 딸이 수염 난 남자를 좋아한다니 마냥 반길만 한 문제는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하는 게 나도 참 아이러니하다. 여하튼 나중에 우리 딸이 연애할 나이가 되면 주변 남사친 중에 수염 있는 녀석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백수 아빠가 생각하는 옛날 아빠, 지금 아빠, 미래 아빠를 재정의해본다.


얼굴에 특징이 없이 심심하게 생긴 게 머리숱도 적은 데다가 피부도 하얘서 영 볼품없는 게 허구연 날 바빠서 애들이 잠든 시간에 집에 돌아오던 게 옛날 아빠라면, 멋진 수염을 뽐내며 집에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지금 아빠일 것이고, 건강도 되찾고 돈도 잘 벌면서 멋진 수염에 멋진 몸매와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며 서핑을 즐기는 자유인 같은 나의 모습이 미래 아빠일 것이리라. 그날을 상상하며 일자 면도기를 구매해 볼까 인터넷을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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