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무게를 아내에게 가볍게 토스! ep.9
나비효과
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대기에 영향을 주고 시간이 지나 증폭되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는가?
-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즈 (Lorenz, E.N)가 사용한 용어로, 초기 조건의 사소한 변화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출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 나무위키 발췌
한숨 효과
The wife's sigh affects the atmosphere of the family and is amplified in a short period of time to correct her husband's behavior.
아내의 한숨이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고 단시간 내에 증폭되어 남편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한다.
- 박감자 (파파고 번역)
어느 한 집안에서 일어난 아내의 한숨소리가 그 집안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한국의 백수 아빠 박감자씨가 사용한 용어로, 아내의 사소한 감정 변화가 집안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출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집안의 가장인 아내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있다. 옛날의 버릇이 나와 아내가 설거지하는 동안에 소파에 퍼질러 누워있다가 아내의 작은 한숨소리가 큰 티브이 소리를 뚫고 내 귀에 도착을 하면 등이 쭈뼛서면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중간에 "여보, 내가 설거지할게 여보는 쉬어."라고 고무장갑을 가로채는 건 눈치 보는 티가 너무 나기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설거지는 아내에게 맡기고 난 괜히 청소기를 든다던가 집안을 정리하게 된다. 그럼 집이 순식간에 깔끔해진다. 긍정적인 아내의 한숨 효과이다.
가끔 아들과 닌텐도 스위치 게임을 하는 도중에 아내가 들이닥치는 경우가 있다. 아내의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면 인터폰에서 '차량이 진입하였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게임에 열중하다가 그만 안내멘트를 놓치고 만 것이다. 어김없이 아내의 한숨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괜시리 아들을 다그치고 둘이 식탁에 앉아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한다. 긍정적인 아내의 한숨 효과이다.
아들의 공부를 전담하고 있는 백수 아빠는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약간의 쉴 틈을 주고 공부를 바로 시킨다. 영어는 딱딱하게 굳은 내 혀로 제대로 된 발음을 가르치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요새는 QR코드만 찍으면 바로 발음이 튀어나오니 걱정을 덜었고, 사실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4학년의 수학이 아직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던 찰나, 가장 자신 있던 국어가 가장 가르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틀린 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줘야 하는데 국어문제라는 게 생각하기에 따라 애매한 것들이 많아 아들의 논리에 "그래, 그 말도 틀린 게 아냐. 난 너의 생각에 동의해." 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그럼 이 애매한 문제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규정해버리고 넘어가 버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는 문제가 쌓이다 보니 가끔 아내가 아들의 문제집을 점검하거나 테스트를 할 때 어김없이 아내의 무시무시한 한숨소리가 내 가슴을 후벼 판다. 아내의 한숨소리와 동시에 인형 가지고 잘 놀고 있는 애꿎은 딸에게 다가가 한글 공부를 시키기 시작한다. '바버보부브비'를 공부할 차례인데 아내에게 잘 보이고 싶어 딸이 열심히 공부했던 '가거고구그기', '나너노누느니', '다더도두드디'를 복습한다. 잘하다가 '도두드'를 못 읽어 애를 먹었지만, 오늘은 귀찮아서 넘어가려고 했던 딸의 공부도 하게 됐다. 긍정적인 아내의 한숨 효과이다.
가끔 아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집중하여 핸드폰에 몰두할 때가 있다. 이건 분명 온라인으로 장보기를 하거나, 통장잔고나 카드값을 보고 있다는 것. 아내의 한숨소리가 후~하고 들리는 순간, 통장잔고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가장 위기의 순간이 온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한숨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이 못난 남편이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이미 오전에 허리 건강을 위한 걷기 운동과 근력운동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운동복을 급히 차려입고 대답도 듣지 않고 한 마디 던진 후 집 밖을 나온다. 덕분에 하루에 두 번 운동하게 된다. 긍정적인 아내의 한숨 효과이다.
여보! 나 운동 갔다 올게. 진정 좀 하고 있어!
집안에서의 아내의 기분상태를 최적으로 만드는 것이 지금 나의 존재 이유이자 할 일이다. 공기청정기마냥 스스로를 '기분청정기'라 명명하여 최선을 다한다. 기분청정기로서 잊지 말고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청소, 설거지는 기본이고, 요리를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저녁으로 먹을 것들을 미리 정하여 요리 재료를 미리 준비해둔다. 바로 요리에 임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놓아 아내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후각이 매우 예민한 아내가 오기 전에 미리 환기를 시키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제는 아들과 한 팀이 되어 아내가 오기 30분 전쯤 내가 외친다. "환기의 시간!". 아들은 즉각 반응하여 온 집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집안의 암울한 백수의 기운이 사라지면 그제서야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아내가 들어오면 현관 앞에서 집사처럼 아내의 가방과 코트를 받아준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따뜻한 말과 함께. 은근히 좋아하는 거 같긴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화를 돋우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내와 밥을 먹거나 맥주 한 잔 할 때에 어김없이 아내의 투덜대는 회사 얘기가 시작된다. 예전이었으면 "그건 네가 잘못한 거 같은데?"라거나, "네가 마인드를 바꿔봐." 등의 질책성 대답을 주곤 했는데 더 이상은 할 수가 없고 해서도 안된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무조건 아내 편이다. 아내보다 더 흥분해서 "그건 정말 아니지!", "미친 거 아냐? 그 자식이 정말 그랬다고?"라는 반응을 해줘 아내의 속을 풀어줘야 한다. 기분청정기가 할 일이다.
그동안 일했던 경험을 살려 아내가 바쁜 시기에 아내의 회사 자료를 다듬어주기도 한다. 금융권의 보고자료는 내가 이해 못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다듬고 PPT자료를 이쁘게 만들어 주면 아내의 기분이 최고조로 오를 때가 있다. "수고했어, 여보가 이런 거 잘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말만 들으면 최고겠지만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집에서 놀고 있다니". 음..할 말이 없다. 그저 기분청정기의 역할을 잘 수행했으니 그걸로 됐다.
사실 심성이 착하고 여린 아내는 나를 구박하거나 눈치를 심하게 주거나 하진 않는다. 한숨소리도 내가 느끼는 만큼 크진 않을 것이다. 분명 나 못지않게 속앓이를 하고 있을텐데 그저 남편이 빨리 몸을 회복하고 제대로 일을 하기까지 참고 기다려주기에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요새 척추 환우들에게 바이블로 여겨지는 '백년허리'라는 책을 읽었는데, 허리디스크에 대한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해주면서 환자들의 감정적인 부분까지 이해해주는 부분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위로가 되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고통으로 인해 가족, 지인들에게 환자로서의 인정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회복기간이 길다보니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어 심하게 우울증까지 겪게 된다고 한다. 나도 주기적으로 심히 우울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내의 이해와 희생을 생각하며 버티고 있다. 남편과 아내. 남남이 만나 서로에게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헌신할 수 있다니 부부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결국 나는 그저 백수로서 자격지심에 스스로 움츠려 들고 눈치를 보게 되어 아내의 숨소리를 크게 받아들일 뿐이다. '아내의 한숨 효과'가 아니라 '백수의 눈치 효과'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주변을 살피는 미어캣처럼, 집안의 구석구석을 점검하고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아내의 한숨 소리가 없어지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