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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y 20. 2024

해지는 풍경을 같이 보는 일, 그 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나는 스무살 이후로 줄곧 아이를 낳고싶어 했다. 한국에서 여자가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내 아이의 애비가 될 사람을 찾아보자. 시작이 틀렸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나고 신뢰를 쌓고 연애의 기승전을 지나 같이 아이를 낳아 키우자 결심을 하는 연애를 했다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그 아이는 이미 성년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연애는 처절하게 망했다. 심지어 마지막 연애는 삶의 의지 그런 종류의 모든 것들을 가루가 되도록 다 깨부숴놓고 사라졌다. 마지막 연애가 끝나고 오래 앓았다.


그자는 그런 내게 어렵게 온 사람이다. 모든 가능성이 0으로 수렴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 사람.    

그자는 자궁근종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는 나를 바래다줬었다. 나중에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었냐고 물으니 그자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내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전신마취로 몸 컨디션이 회복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그자는 고스란히 다 지켜봤었다. 오늘 하고싶은 얘기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스무살, 뭘 안다고 아이를 낳고싶어 했을까. 왜 그랬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와 일찍 헤어지고 그 결핍이었을까. 번번히 무참한 사이를 지나며 나는 어쩌면 평생 헤어지지 않을 사람 하나를 가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세상으로 데리고 온 사람, 평생 곁을 지켜줄 사람. 어리석은 마음일까. 너무 과한 기대였을까. 더는 사람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 생각을 접자 남자도 연애도 한꺼번에 다 접어졌다. 친구들이랑 얘기하다 웃으면서 지구 환경을 위해서 나는 접을께 했지만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내는 지점에 도달하고서야 아물었다. 정작 아니다 하면서도 자궁을 절제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세상이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아예 불가능한건 다른 얘기였다. 조금 더 버티고 싶었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살려두고 싶었던 것 인지도 모른다. 나는 부분 수술을 선택했고 내 자궁은 살아남았다.


수술경과는 나쁘지 않았다. 근종이 다시 자라긴 했지만 위치도 안정적이고 이년 가까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4개월, 6개월, 10개월로 정기 검진 주기도 늘어났다. 주변에서 고령 산모들의 임신 출산 소식이 들려왔다. 접었던 아이 생각이 슬슬 다시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그자라면 같이 아이를 낳아 길러도 좋지 않을까. 지금이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지 않을까. 그자의 생각보다 내 나이와 컨디션을 먼저 생각했다. 약간 조바심이 일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코로나로 내 자금사정은 삼년째 개박살이 나고 있었지만, 나는 출산하기에 이미 나이가 너무 많지만, 심지어 자궁이 그렇게 썩 건강하지도 않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낙관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가 다급했다. 미리 엽산이라도 좀 먹어야할까?


(지금은 사라진 우리나이로) 내 나이 마흔 셋, 병원 정기검진에서 조심스럽게 선생님께 물어봤다.


"선생님 제가 임신 준비를 해도 괜찮을까요?"

"나이가 많은게 문제지 다른건 괜찮아요."


가능성을 확인하자 다른 생각이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아이를 혼자 낳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래 고민하던 생각을 그자에게 물었다.


"자기는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그자는 가능한거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내가 나이는 많지만 가능하다고 선생님이 괜찮다 그랬다고 애써 밝게 얘기했다. 자기는 상상도 안했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고생하는 걸 다 지켜 봐서 아이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더 말을 이어갈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다시 한 번 더 아이 얘기를 꺼냈다. 그자는 그제야 내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걸 알았다. 이 남자의 미래에 나는 있어도 우리 사이의 아이는 없었다. 일단 내가 가능은 하다고 했지만 임신 출산 과정으로 내가 져야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거기다 집 한칸 없이 나를 만나도 될까 고민하던 고지식한 이 남자는 지금의 경제상황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 무턱내고 내 욕심에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무사히 잘 키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하긴 원한다고 계획대로 아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두고 출산을 해도 변수가 여럿인데 지금 이 상황으로 당장 애 기저귀 값이 없을수도 있겠지. 너무 서글펐다. 정신을 차려보자. 그래 우리는 지금 결혼도 못하고 있는데. 더는 얘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내가 그러고 싶다고 덜컥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좀 더 일찍만났다면 어땠을까. 내가 없는 평행세계 어딘가에서 당신이 무던한 삶을 살아간다면 나는 너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있는 그 시점에 닿기 위해서는 내 상황이 좀 나빠져야 했지만 여타의 조건들을 수정하고 싶지 않은게 진심이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는 묵묵히 말줄임표 뒤로 사라졌다. 그 말을 하던 순간에 그자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테니까.


올해 3월말, 정기 검진 결과는 나쁘다.  없던 근종이 여럿 새로 생기고 빈혈수치는 나빠졌고 자궁 안에 피가 좀 고였다고 한다. 처방받은 피임약을 먹으며 기분이 엉망으로 휘둘렸지만 넉달 뒤 약이 어떻게 작용을 했을지 확인해야하니 함부로 약을 끊을수도 없다. 아이를 바라던 시간이 너무 먼 과거같았다. 처음 수술 권유를 받았을 때 내가 평생 여자로 살아온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느낌에서 한 발 나아간 느낌이다. 그간에 지나온 시간이 있으니 어쩌면 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의 미래에는 서로가 있을 뿐이다.


https://brunch.co.kr/@parler-kj/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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