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주씨 May 27. 2024

데이트

이것은 맛집 소개가 아닙니다만,

나는 무신경할 정도로 계획이 없는 인간이다. 계획을 차근히 세웠다 기대가 무너지면 어쩐지 너무 맥이 빠진다. 이상하게 공들여 계획을 짜면 꼭 무슨 일이 생긴다. 온갖 무슨 일의 아이콘은 서서히 그렇게 무계획형 인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계획이 없기로는 그자가 나보다 한 수 위다. 우리는 대체로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주말을 맞는다.


슬슬 좀 움직여볼까? 하고 집을 나서면 대체로 청사포까지 간다. 거기까지 가면서 오늘의 날씨를 기준으로 대충 어느 방향으로 차를 몰지 결정한다. 청사포까지 가지 않고 회전교차로에서 차를 돌릴 수 있는 날은 운이 좋다. 약간 허랑방탕한 느낌을 낭낭하게 살려 그렇게 길을 나서 송정을 찍고 고속도로를 타고 대동할매국수를 먹고 그대로 남쪽으로 차를 달려 다대포 해지는 풍경을 보러 가는 날도 있고, 정 반대 방향으로 나서기도 한다. 꽃이 피는 계절에는 꽃자리를 따라나서기도 하고, 괜히 바다를 따라 한참을 달리기도 한다. 동네에서 그럭저럭 한 끼를 해결하고 시장에 들러 약간의 수렵채집을 거치고 다시 집에 와 영화를 보는 날도 있다. 제일 중요한 지표는 지금 배가 얼마나 고픈가 일뿐. 이동거리는 배고픔과 반비례한다.


요새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꼭 가는 코스는 영도 남항시장이다. 우리 집에서 유료다리 두 개를 지나면 남항시장 공영주차장에 도착한다.


주말 브런치는 뭐다? 국밥이다.


시장을 한 바퀴 먼저 도는 날도 있고 바로 국밥을 먹으러 가는 날도 있다. 항상 고민을 하는데 대체로 제주할매국밥을 간다. 국밥을 먹기 전에 일구향의 소룡포를 한판 먹으면 애피타이저로 끝내주지만 위장이 작아졌다. 아쉽지만 단호하게 일구향을 포기한다. 사실 오는 길에 이미 돼지국밥을 시킬지 섞어를 시킬지 머릿고기는 순대반반으로 시킬지 내내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사진은 머릿고기 순대반반으로 대자를 시키면 가능하다. 머릿고기는 따듯하게 먹어야 맛있음. 만오천 원)


거침없이 그날의 주문을 하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클리어하고 가게를 나서면 기분이 산뜻하다. 그럼 시계를 본다. 커피미미를 가야 하니까.


커피미미는 3시까지만 영업하는 까페다. 주중에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가끔 카누를 한 봉지 타서 마실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부스터지 커피가 아니다. 소중하게 기다린 주말, 잔에 마시는 커피가 얼마나 귀한가 말이다. 특히나 커피미미의 커피맛은 일부러 다리 두 개를 건너 찾아갈 정도로 훌륭하다. 라떼도 핸드드립도 심지어 디저트도 다 맛있는 커피집이라니!!! 근데 국밥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라니 어떻게 이 코스를 포기할 수 있겠냐고.


국밥-커피 코스를 마치고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꼭 들르는 포인트가 또 하나 있다. 아직 이름을 못 외운 시장 빵집. 이 집은 되게 옛날 스타일의 단과자빵들을 판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건 얇게 구워낸 카스테라로 하얀 앙금을 만두피처럼 감싼 형태의 빵이다. 요걸 요걸 카스테라 만주라고 부르는 걸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비앤씨에 파는 건 좀 고급버전으로 밤도 들어있다. 근데 그게 느낌이 아니야. 어릴 때 자주 먹던 빵인데 요새는 이 빵이 거의 다 사라졌다. 이건 그냥 시장버전으로 먹어야 제 맛이다.  남항시장에서 발견하고 순간 헉! 하고 소리를 낼만큼 반가웠다.


시장을 돌다 저녁에 먹을 메뉴를 생각하고 간단하게 장을 봐오는 날도 있다. 볕이 좋은 날은 괜히 영도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시간이 좀 느슨하게 흐른 날은 괜히 송도나 다대포까지 가보기도 한다. 결과는 알 수 없다. 아 너무 거하게 먹어 식곤증이 오는 날은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느지막이 저녁을 먹거나 술 한 잔 하거나. 이젠 내가 술을 안 마시지만.


그렇게 나선 어느 날, 통도사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부처님 앞에 절을 할 때 속 시끄러운 중생은 대체로 좀 간절한 편이다. 어느 하루 그날은 머릿속에 가슴속에 아무 소원도 바람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온전히 평화롭게 그저 단정히 공들여 삼배했다. 그날 돌아오며 그자에게 오늘은 아무 바람도 소원도 빌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참 행복한 날이라고 얘기했다. 우리가 함께 이대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무슨 바람이 더 있을까.


사는 일은 종종 아니 자주 부대낀다. 연애도 어떻게 매번 애틋하고 절절할 수만 있을까. 시간을 같이 지나오며 쌓인 이야기는 꾸밈말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너무 줄인 나머지 서로에게 무딘 상처가 되는 날도 있다. 그럴 때 그 원 없는 마음으로 절을 하던 날을 생각한다. 그래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지. 어색한 공기가 그게 다가 아님을 아는 나이와 사이.


아직 돌아올 주말 계획은 없다. 주말은 유월이네.

송정에다 의자 펴고 광합성이나 할까?

그 날 봐서.

그래.

이전 13화 해지는 풍경을 같이 보는 일, 그 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