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긴긴밤이 찾아온다면 _ <긴긴밤>

_ by 루리 : #동물과 인간 #단 한 사람

by 유재은


연초록 풀밭 위에 코와 부리를 맞대고 있는 흰바위코뿔소와 아기 펭귄이라니. 그들을 둘러싼 다감한 오렌지빛 하늘과 사랑스러운 복숭아빛 구름. 그와는 대조적인 '긴긴밤'이라는 제목과 부러진 코뿔에 마음이 가서 나도 모르게 표지를 쓸어내리게 되었는데, 그 감촉마저 여느 책과 달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열었던 책이에요.


게다가 흰바위코뿔소의 감은 눈과 아기 펭귄의 뒷모습만으로도 둘 사이에 흐르는 가득한 사랑이 느껴졌기에 이 특별한 관계의 긴긴밤이 무척이나 궁금해졌지요. 아기 펭귄은 어쩌다 바다가 아닌 푸른 초원 위를 걷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서사를 막연히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해졌습니다.


흰바위코뿔소 노든은 말년에 왕처럼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구절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노든의 먹거리와 잠자리, 적절한 치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종일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노든은 조금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노든에게 와닿았을 거라 믿어요. 분명 노든은 그가 복수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노든은 정말 행복했을까요.


작가는 2018년 출근길에 뉴스로 알게 된 '마지막 남은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죽음으로 세상에 하나 남은 존재, 노든의 긴긴밤을 창조해 냈다고 해요. 담백한 글과 시리도록 따스한 그림이 노든과 아기 펭귄, 치쿠와 윔보, 그리고 앙가부의 삶과 이토록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니,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질 만큼 팬이 되었답니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가 되고 싶어 했던 노든은 코끼리 할머니의 격려 덕분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어렵게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노든에게도 행복이 찾아와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함께 하게 된 것이지요. 셋이 같이 만들어가던 사랑이 충만한 밤은 잔혹한 뿔사냥꾼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납니다. 피로 가득한 웅덩이를 바라보는 처참한 노든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복수와 분노가 가득 차게 된 것은 당연하지요. 그 후 노든은 매일 긴긴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동물원에서 만난 유쾌한 친구, 앙가부 덕분에 조금씩 힘을 내게 되지만 또다시 찾아온 뿔사냥꾼들에 의해 앙가부를 잃게 된 노든을 보며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졌어요. 내가 노든이었어도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었을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이라는 것이 동물원에도 덮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부서진 동물원을 떠나 목적 없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 노든은 양동이에 알을 넣어 부리로 물고 가던 치쿠와 만나 함께 바다로 가게 돼요. 펭귄 치쿠는 둘도 없는 친구 윔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함께 돌보았던 버려진 알을 지켜내어 바다로 데려다주려고 했거든요. 이렇게 해서 아기 펭귄은 노든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름을 갖고 싶다며, 그래야 떠난 후에도 다시 만날 때 서로를 알아보기 쉽지 않겠냐는 아기 펭귄의 말에 노든은 이름이 없었을 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데 마음이 아렸어요. 아내와 딸을 잃은 후 인간들에게 치료를 받아 동물원에 가기 전까지 노든에게는 이름이 없었으니까요. 자연에서 바람보다 빠르게 달리던 흰바위코뿔소 노든의 미소를 상상해 봅니다. 물론 자신을 지켜준 세 아버지들과는 달리 자기만 이름이 없어 아기 펭귄은 섭섭했을지도 모르지만, 노든의 말처럼 둘은 언제 어디서든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서로를 알아볼 거예요 내가 먼 실루엣만으로도 두 딸들과 남편을 알아보는 것처럼요.


동물들이 주인공인 동화 중 '마당을 나온 암탉'을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해 왔는데 '긴긴밤'을 더불어 마음에 품게 되었네요. 긴장감 있는 사건이나 특별한 반전이 있지는 않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깊은 사유를 던져주는 책. 스토리를 알고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책을 좋아하는데 노든의 이야기도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지구에 살아가는 같은 생명체로서 노든과 아기 펭귄에게 미안한 마음을, 때로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존재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버티기 힘든 긴긴밤이 다시 찾아온다면 책장에서 살며시 꺼내어 서로의 긴긴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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