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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Apr 10. 2024

지금 이 순간에도 _ <난민 소년과 수상한 이웃>

_ by  베아트리스 오세스 : #난민


법정 동화라니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며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우였습니다. 오히려 시니컬한 마리네티 변호사가 한 소년을 '호두'라고 주장하며 정년을 앞둔 판사에게 골칫거리를 안기는 모습이 호기심과 미소를 자아냈어요.


마리네티 변호사는 부모님이 화재로 돌아가신 뒤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마음에 문을 닫은 채 차가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분노는 그녀로 하여금 이웃의 소소한 것들, 이를테면 재봉틀 소리가 시끄럽다는 등의 트집을 잡아 소송을 걸게 했어요. 안 그래도 그녀가 제기하는 자잘한 소송 때문에 힘들어하던 파나타 판사는 새롭게 시작된 황당한 사건에 괴로워합니다.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인심을 잃고 있었던 마리네티 변호사는 왜 소년을 호두라며 억지스러운 소송을 이어갔을까요. 혹시 판사와의 지독한 악연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작가는 둘의 법정 다툼 속에서 깊은 주제를 무겁지 않게 건넵니다. 마리네티 변호사는 자신의 호두나무에서 떨어진 ‘호두 한 알’ 이니 소년에 대한 법적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호두는 난민 소년 '오마르'였습니다. 오마르는 부모님과 함께 내전을 피해 바다 위를 떠돌다가 눈앞에서 부모님을 잃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바다는 듣지 못하니까요.” (p.43~46)


오마르는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에 빠진 채 차디찬 밤바다를 버티어 냅니다. 구명조끼에 이름을 써주며 육지에 꼭 갈 수 있을 거라던 엄마의 말이 오마르를 낯선 나라에 도착하게 해 주었던 거예요. 하지만 오마르는 다시 전쟁터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난민 수용소를 탈출합니다. 그 후 아이들의 놀림을 피해 달아나다가 운명처럼 마리네티 변호사의 호두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또 하나의 기적이 된 것입니다.


오마르는 마리네티 이웃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식물학자, 디자이너, 제화공'은 마리네티가 건 소송 때문에 그녀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모두 한 마음으로 오마르를 호두라고 하는데 증인이 되어 줍니다. 증인들까지 나서고 검사마저 마리네티 주장을 옹호하자 파나타 판사는 아주 곤란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판사는 손녀 발레리아의 이야기 덕분에 오마르에게 '꽃과 같이 자랄 권리'가 있음을 공감하며 마리네트의 손을 들어주게 돼요.


작가는 동화의 마지막에 '아몬드'의 이야기라는 열린 결말을 선사하며 따뜻함을 한 스푼 더 얹어 놓습니다. 나의 추론으로 판사는 마리네티 할아버지가 구해냈던 '아몬드'였던 거예요. 마리네티는 할아버지가 승소했던 아몬드 소송으로 호두 소송을 생각해 냈는데, 파나타 판사가 바로 아몬드였다니 호두 오마르의 미래에 대한 따스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습니다.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징검다리가 되고 있는 이탈리아의 람페두사섬에 대한 기사와 소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그 섬은  '유럽 최대 공동묘지'라고도 불리고 있지요. 소설을 덮고 거실로 나오는데 아늑한 가족의 온기 속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밤을 기억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명조끼 하나 없이 위험한 보트를 생명줄로 삼아 앉아 있지도 못한 채 수많은 낮과 밤의 태풍 속을 표류하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멘 난민으로 인한 논란이 이어왔지요. 그것에 관한 토론을 할 때 아이들은 막연한 상상 속에서 우리의 이익만을 먼저 떠올리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부디 이 '호두'의 이야기를 통해 깊고 너른 시선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이전에 실패했던 사람들 생각은 하지 말자.
그들의 사지가 어떻게 바닷물에 쓸려
퉁퉁 부풀어 올랐는지 알려고도 하지 말자.

저기 우리 아래쪽에 쌓인 채 해체되고 있는지도 묻지 말자."


- <난민들>, 안느리즈 에르티에



✐ '호두'가 되어 같은 스토리를 일기로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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