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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May 29. 2024

가림빛

# 프롤로그


# 가림빛
  
 : 다른 동물의 공격을 피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동물의 눈에 띄지 아니하도록 주위와
   비슷하게 되어 있는 몸의 색깔.



25년 동안 하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누군가는 전문성과 꾸준함을 격려해 주었고 또 어떤 이는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러한 시선들이 나의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애써 장착하게 했습니다.


불안한 미래의 막연함 속을 살아가던 시절에는 몰랐습니다. 하나만을 향해 걸을 때 문득 찾아오는 권태를 말이에요. 그것은 늪이 되어 영혼을 잠식시키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것이 진정한 나의 길이 아니어서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생존을 위한 밥벌이,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마음이 진정 원하는 일을 했다면 지독한 권태는 나를 찾지 않았을까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언젠가 그리운 시절로 회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 멈춥니다. 무언가를 하며 그것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환원받을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의미 있었던가 하고 말이에요. 그렇게 다시 길을 걷고 얼마 간의 시간의 흐른 후 또다시 버거움과 마주합니다.


마음 깊이 스며든 그늘이 주말의 끝자락에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밤. 여린 막내의 속상해하는 모습이 되레 나의 어둠을 조금씩 몰아냈습니다.

"무룩이가 온 거야?"

우리는 힘들 때를 '무룩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감정을 마주하며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더라고요. 딸의 무룩이가 나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아이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우뚝 선 나무로 변하니까요. 나는 엄마라는 단단한 모습을 일으켜 세우며 마음의 그늘을 조금 걷어냈습니다. 돌아선 잠자리에서는 다시 무너지게 되더라도 말이에요.


막내 덕분에 옅어진 무룩이는 아침이 되자 잠에서 깨어 출근길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런데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큰딸의 미소를 보니 마음의 구김이 조금 펴졌어요. 하지만 아직 출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대로는 제빛을 보일 수 없을 것 같아 좋아하는 카페를 향해 운전대를 돌렸어요. 30분 정도밖에 시간은 없었지만, 그래도 높은 층고와 전면창 가득한 봄 햇살을 바라보며 이 카페만의 특별한 라떼를 마신다면 하루를 버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내 삶의 긴급 수혈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달곰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던 그 작은 시간과 두 딸의 존재가 나의 살아감에 가림빛을 주었습니다. 일상의 권태로부터 나를 지켜낼 보호색이 필요한 날. 볕뉘 같은 조그마한 순간들이 모여 내게 힘을 준 거예요. 새로운 연재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도 구체적인 구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용하지 않은, 무용해도 좋은 내 삶의 빛의 순간들'이 시작되었습니다.






* 볕뉘 :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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