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재은 Jun 12. 2024

모싯빛

_ 달리는 순간들


 # 모싯빛
  : 모시의 빛깔과 같이 엷은 노란빛.



문득 바래지 않는 유년의 추억들이 떠오르면 마음이 모싯빛으로 물듭니다. 긴 방학이면 책장 가득 채워진 책들을 하나씩 꺼내 뒹굴거리던 나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유일하게 좋아했던 활동적인 놀이는 자전거 타기였지요. 그 시절에는 자전거를 가진 아이들이 드물었고 동네마다 자전거포가 있었어요. 이용료도 저렴한 편이어서 하교 후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1시간이나 2시간을 마음껏 내달렸습니다.


회전목마 타는 것만으로도 스릴을 느끼던 겁꾸러기는 이상하게도 자전거 탈 때만큼은 제법 과감했어요. 속도를 즐기며 손을 놓고 달리기도 했으니까요. 누구에게 자전거를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좀처럼 밖에서 놀지 않으려던 내가 유일하게 두말없이 나가는 건 자전거를 탈 때였어요. 그렇게 그 시절의 나는 단짝 친구와 장난감 워키토키로 "나와라, 오버!"를 외치며 미로 같은 골목길을 누볐습니다.


자전거 타는 게 좋았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었어요. 지금이야 온라인에서 쉽게 길 찾기를 할 수 있지만 여행 때도 지도를 사용하던 시절에 골목길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초등학생이 알 수는 없었으니까요.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듯 낯선 길에 접어 들 때는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몰라 두근두근 마냥 설렜고, 운 좋게 그 길이 낯익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게 되면 중대한 미션을 성공한 것처럼 벅찬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슈퍼까지, 혹은 놀이터까지 가는 더 가까운 골목길을 발견하면 우리만의 보물처럼 비밀로 간직했어요. 때로는 낯선 길 끝에서 가로막힌 벽을 만나기도 하고 무작정 달리다 제법 먼 곳까지 가기도 했던 우리는 우리만의 새로운 땅을 개척해 나가는 꼬마 탐험가였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비던 골목길은 버스로 한 두 정거장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는 당시 인기 있던 TV 시리즈인 '전격 Z작전'의 주인공처럼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향해 '키트'라 부르기도 하며 시간 안에 키트를 자전거포에 되돌려주기 위해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후에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한 후배는 내가 운전한다는 것을 알고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며 놀라기도 했어요. 그만큼 겁이 많은 선배였으니까요. 지금도 여전히 운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듣고 싶은 음악을 재생하며 달리는 시간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잔잔한 물결로 만들어 줍니다. 게다가 비록 짧은 순간이더라도 나 홀로 노래방 같은 시간을 보내면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도 들어요. 내게 있어 운전은 달려오던 길에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두며 일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게 운전하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태우고 어디든 함께 가는 길은 행복합니다. 자전거는 지난해부터 발 때문에 못 타게 되었는데 가끔 몇 살까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운전을 못하게 되면 책을 읽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슬플 것 같아요. 더 늦기 전에 유럽에서 가족들을 태우고 운전하며 여행하고 싶기도 하고, 아우토반 같은 길을 음악과 함께 신나게 달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표현하지 못해서 마음껏 홀로 달리는 것을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달리는 모든 순간들도 언젠가는 내 삶에 모싯빛으로 남겠지요. 달릴 수 있어, 걸을 수 있어 그저 감사한 오늘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