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꿈을 그리다.
# 감빛
: 잘 익은 감의 빛깔과 같은 붉은빛.
지난겨울 뒤늦게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포맷의 방송에 식상해져 경연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는데 '무명가수전'은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가수'. 그들의 꿈을 향한 지난한 세월이 아린 마음을 자아냈습니다. 그 깊은 간절함을 바라보며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라도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을 안아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이 노래였다면 나의 항해는 읽고 쓰는 것이라는 돛을 달고 있습니다. 비록 늦은 시작이었지만 말이에요.
감히 작가라는 꿈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고작 몇 번의 도전만으로 가슴 뛰는 삶을 향한 마음을 접을 만큼 용기 없는 젊음이었네요. 그래도 모두 거둬들일 수는 없었나 봐요. 쓰는 삶을 향한 바람은 글 쓰는 언저리라는 생업에 머물게 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묻어두었던 나의 언어들은 어느새인가 조금씩 제 존재를 드러내며 마음을 일렁이게 했습니다. 포기한 게 아니라 꿈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부족한 첫 책을 내고 숨겨두었던 동화 습작으로 예상치 못한 등단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환희 후 6년이 흐르는 동안 투고와 공모전의 실패가 아파도 일상처럼 여겨지게 되었네요. 매일 써도 모자라기만 한데 여전히 읽는 것을 더 좋아하고 밥벌이를 핑계로 가끔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정말 나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읽는 것으로 쓰는 삶을 유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에요.
나의 삶과 닮아서 가슴이 쿵 내려앉게 했던 애니메이션 속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영화 '소울'의 주인공인 '조' 예요.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꿈을 품고 있지만 현실은 학교 음악 선생님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는 유명 밴드와의 재즈 연주라는 일생일대의 기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환상적인 공연을 마친 조는 재즈 클럽을 나서며 공허한 눈빛을 보여줍니다. 잔뜩 감정 이입하며 조의 환희를 함께 만끽하려던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그제야 비로소 꿈의 길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조는 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꿈을 이루고 나니 짙은 허무함이 느껴졌을까요. 아니면 음악 선생님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했던 마음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또 다른 주인공인 '소울 22'는 자신만의 불꽃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다가 햇살 속 눈부신 하늘과 나뭇가지의 흔들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와 같이 조도 꿈을 반드시 이루어야만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삶이 눈부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나도 불꽃처럼 가슴 뛰는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삶이 무의미할 거라는 생각을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이 듦'이라는 생의 선물이 살아감의 시선을 다르게 해 줬어요. 꿈을 목적으로 하는 인생이 아닌, '꿈을 그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말이에요.
몇 달 전 엄마 덕분에 알게 된 가수들이 하는 콘서트에 엄마를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유명해진 무명가수들이 잘 익은 감처럼 고운 빛깔을 뿜어내는 것 같았어요. 그들이 잠시 반짝이다 다시 잊히지 않기를 바라다가 생각해봅니다. 이루지 못하면 또 어때요. 감빛 꿈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짝이는 인생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