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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Jul 03. 2024

제빛

_ 나의 고마운 친구


# 제빛
 : 본래의 색깔.

# 풀빛
 : 풀의 빛깔과 같은 진한 연둣빛.

# 물빛
 : 물의 빛깔과 같은 연한 파란빛.



마흔에는 마음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서른 즈음에' 보다 더 깊은 생각이 드는 '마흔 즈음에'는 제법 괜찮은 나이 듦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스물의 시간 같은 풀빛 향기는 없어도 잔잔한 물빛으로 충만했던 마흔의 시간들. 생의 파도는 여전히 여름날의 태풍처럼 찾아왔고 그로 인해 세차게 흔들리기도 했지만, 또다시 고요한 바다의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나의 친구, 책 덕분입니다.


이보다 더 바닥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기어이 책을 찾아 문장의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았어요. 내 삶의 계절마다 모서리 가득 접혀 있는 책들이 나를 위로하고 이끌어 주었습니다.


책을 읽으면 어느 순간 내가 살아가는 삶의 층위가 달라졌습니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조금 더 멀리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찌는 듯한 열대야가 이어지는 날이면 더위를 잊게 해 줄 만큼 몰입하게 하는 소설이 친구가 되었고, 뾰족한 마음을 동그랗게 빚고 싶을 때는 시가 벗이 되었으며 지치고 힘든 날이면 첫 문장부터 나를 안아주는 작가의 에세이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순간 환하게 빛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은 내면에 스위치를 켜주지요. 마음의 빛깔이 달라지니 내가 사는 세상도 따스해집니다. 그래서 글 숲을 걷고 또 걷게 되나 봐요. 생각만으로도 아득해지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우주의 먼지처럼 보일 때조차 문장 산책은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을 뉘이며 나라는 사람의 제빛을 찾게 해 주니까요. 이토록 귀하고 고마운 친구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요.


나의 친구는 나로 하여금 좋아질 수 없는 것들에 얽매여 '좋아질 수 있는 것' 들을 잃지 않게 합니다.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놓치지 않게도 해주고요. 젊은 시절 알 수 있었다면 달라질 것들과 묵직한 나이를 쌓아가도 꿈을 잃지 않는 마음의 용기가 있다면 달라질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소음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온갖 상념에 서성이는 마음을 붙들어 줍니다.


때로는 몰라서 읽는 게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던 마음이 글로 형상화되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알아도 기운을 얻지 못하던 내 마음을, 살아감에 지쳐 주저앉은 나를, 그 마음과 같은 문장이 또렷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다독이며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오늘도 살아감에 환기를 찾아서 한 장 한 장 제빛을 향해 산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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