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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Oct 10. 2022

단순노동의 시작


내가 고등학생이던 1990년, TV에서는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인기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꿈과 낭만, 사랑을 그린 드라마로 당시 인기 절정의 하이틴 스타들이 대거 등장해 화제가 되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진실 씨를 비롯 아직도 미남 배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장동건 씨의 리즈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추억의 드라마다. 가슴에 원서로 된 전공 서적을 끌어안고 대학 교정을 누비는 당시 최고 청춘스타들의 모습은 대학교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다시 본다면 복고패션은 그렇다 치더라도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 때문에 한쪽 눈은 감고 봐야 할 것 같지만.. 한때는 멋졌던 것들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그 빛을 잃는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순수했던 걸까? 멍청했던 걸까? ‘대학교만 가면 모든 것이다 해결된다’라는 어른들의 말을 믿는 아이들이 지금보다는 많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 말보다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연애만 하면서 대학교 교정을 누비는 멋진 연예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대입 합격’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하는데 더 기여를 했지만 말이다. 대학교만 가면 더 이상 지긋지긋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도시락 2개를 들고 새벽별을 보며 등교해 야자를 마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하교해야 하는 답답한 고등학교 시절에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교정이 예쁜 대학교에 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고 그 교정에서 잘생긴 남자 친구를 만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희망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삭막한 수험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아!! 별밤지기 이문세 오빠의 달콤한 목소리와 석식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어 늘어난 뱃살이 교복 단추를 날려버리게 만들었던 아이스크림도 있구나.


그 당시 나의 대학생활에 대한 모든 지식은 TV 드라마나 순정만화책을 통해서 얻어진 것들이었다. 말 그대로 연애도, 사회생활도 모두 글로 배운 사람이 바로 나다. 가난한 집안의 대학 새내기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남자 친구를 만나 알콩달콩 연애를 한다. 운이 좋으면 주인공을 좋아한다는 남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 행복에 겨운 선택을 해야 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건 공부도 잘하고 부자에 얼굴도 잘 생긴 남자 두 명이 주인공을 좋아한다는,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게 하려면 대학에 입학에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공부가 아니라 아르바이트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과 드라마들이 중간과정을 너무 많이 생략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하는데 그래서? 그 멋진 남자 동급생이 있는 아르바이트는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는데? 지금은 SNS에 다양한 일자리 플랫폼이 만들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벼룩시장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던 시대였다.


신념 따위는 가져본 적 없는 나지만 오랫동안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란 것을 해 온 탓에 나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작은 조건은 가지고 있었다. 첫째, 창의적이지 않은(한마디로 머리는 쓰지 않는) 단순 노동일 것. 둘째, 남들 출근할 때같이 출근하지 않을 것. 쓰고 보니 '난 일하기 싫어요. 놀고먹을래요.' 하는 것 같네.


주변머리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근무조건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대학생 아르바이트의 종류는 대부분 저런 조건이다. 고용주는 값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고 우리는 대학에 들어오느라 과부하가 걸린 뇌를 식히며 돈도 벌 수 있으니 위윈이란 건 이런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학교 공지 게시판을 통해 나는 첫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내 눈을 사로잡는 아르바이트 구인 전단지는 바로 채점 아르바이트. 채점 아르바이트는 사설 입시 학원에서 주관하는 모의고사 시험지의 주관식 답안을 채점하는 아르바이트로 고등학교에서 시험이 끝난 뒤 답안지를 학원으로 수거해 와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고 3 수험생활을 하는 동안 수십 번의 모의고사(그 당시에는 배치고사라고 불렀다)를 치르며 도대체 이 애매모호한 주관식은 누가 채점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돈도 벌면서.. 함께 할 친구 몇 명을 모아 전단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아르바이트 신청을 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신청 완료. 저기.. 단순노동이라지만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요?


아르바이트 장소는 입시학원 강의실로 작은 책상이 붙어 있고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이런 형태의 강의실을 갖고 있는 곳이 없는데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정석과 성문 기초 영문법을 가르치던 단과학원 강의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곳에서 수업을 들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답안지를 채점하기 위해 앉아 있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했다. 단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 짧은 기간 동안 무엇을 얼마나 더 알아서 다른 이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일까. 수험생이 대학생이 되었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황당한 아르바이트였고 지난 나의 모의고사 점수에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생각일 뿐 그 당시에는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래, 난 이제 놀고먹는 대학생이다!!!


간단한 설명이 있은 후 그룹별로 답안지가 배정되었다. 그리고 정답지와 비교해 채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예상대로 국어과목에서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아'다르고 '어'다른 우리말은 해석하는 이에 따라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애매한 경우가 종종 생긴다. 단답형이라면 상관없지만 서술형은 읽으면 읽을수록 헷갈리는 말들이 많아진다. 국어 전공자이거나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라면 그 선을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제 막 수험생 신분에서 벗어난 비전공자인 우리에게는 채점하기 애매한 정답들이 너무 많았다. 젠장 풀 때도 애매했는데 채점할 때도 애매해서 헤매야 하다니.. 단순노동인 듯 단순노동 아닌 단순노동 같은 채점 알바여~~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동안 여기저기서 빗발치던 질문 공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국어 과목의 채점이 끝나서였기도 했지만 나름 요령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따져가며 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만날 일 없는 시험지 주인의 성적을 생각해 줄 만큼 우리는 친절하지 않았다. 아마 그날 시험을 본 학생들 중에는 억울한 학생들도 꽤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부디 같은 답을 쓴 학생들이 아는 사이가 아니길... 채점 아르바이트생 입장에서 보면 답안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소위 공부와는 담을 쌓은 학생들이 최고의 학생이었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으니 쭉쭉 사선을 긋기만 하면 된다. 점수를 계산할 필요도 맞는지 틀리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답안지를 보면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고맙던지.. 하지만 풀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는 답안지를 볼 때면 이 답을 쓰기까지 얼마나 갈등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한 번 더 살펴보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도저히 맞게 해 줄 수 없는 답인 경우 가장 마음이 아팠다. 노력 점수라는 항목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건 최선을 다 했다면 그걸로 됐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그저 실패한 루저들의 자기 위안일 뿐이다.


오후 늦게 시작된 채점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때는 이미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그리고 지금은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하는 리어카에서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득 비가 내리던 답안지들이 생각났다. 그 답안지의 주인은 그 밤, 망친 시험에 잠 못 들고 있었을까? 아니면 모든 걸 잊고 내일의 나에게 공부를 맡긴 채 꿀잠을 자고 있었을까? 장담하건대 어느 쪽이었건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것이다.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고..” 추억은 잘 포장된 선물 같아 그것을 꺼내 볼 때는 늘 미소를 짓게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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