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밑천을 들여다보기
팀원들과 나는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 님을 '시영이형'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일단 형일 것 같긴 하고, 그의 작업은 물론 종종 인스타그램에 남기는 메시지들이 보기 드물게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김수영 시인 같은 느낌이다. 우렁차고 크게 외쳐서가 아니라 작업은 물론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단단한 짱돌 같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 씨가 마른 야성미가 있다. 최근 디자이너 채용을 진행하며 하나의 포스팅을 남겼는데 이런 말이 있어 마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기 위해선 내가 가진 밑천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뭔가 하고 싶은 걸 하러 회사라는 울타리를 나가는 것보다는 조금 더 다른 삶을 모색해보고자 한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호기로운 결정과 달리 덜컥 겁이 나게 하는 말이었다.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긴 했지만 나는 정말 내 밑천을 냉정하게 평가해 본 적이 있을까. 회사가, 사람들이 더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한 기억은 많은데 '아, 여기가 내 바닥이구나'하고 내가 내디딘 위치를 확인해 본 적은 몇 번이나 되었던가.
나도 이 바닥에서 벌서 15년 차, 그런데도 남들이 마케팅하는 제품은 다 멀쩡해 보이고 막상 어떤 제품이 마케팅당하기 위해 내 손에 들어오면 단점만 보이고 약간 초조해진다. 내부자 입장에서 너무 단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제품이 구릴 수도 있다. 그래도 뭔가 다른 제품들과 차별화되는 한 꼭지가 있다면 한시름 놓는다. 그만큼 세상에는 애매하고 비슷하여 눈에 띄지 않는 제품들이 많다는 얘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치 유체이탈한 것처럼 내가 나를 저-기 멀리서 바라보며 내가 서 있는 공간과 나의 위치를 잘 파악해보아야 한다. 정확한 위치 선정은 그다음 문제다. 그런데 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를 마주하는 것만큼 그렇게 세상 마음 시린 게 또 없다. 입덕부정기처럼 부정하는 시간을 한 번 갖고, 다시 과거를 이렇게 저렇게 뒤집어 보고, 희망회로를 돌리다가 결국 다 타버려서 몇 안 되는 남은 조각들을 다시 내 손으로 주섬주섬 주워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끝내 타지 않고 남아버린 조각들이 나의 밑천일지도 모른다. 말하고 보니 입적하신 스님들 같다. 스님들은 사리가 남고 나 같은 중생은 몇 안 되는 밑천이 남고. 결국 그 몇 개의 조각을 붙잡고 가야 한다. 그 조각들을 갈고닦아서 멧돼지를 잡아먹든 풀을 뜯든 동굴에 그림을 그리든, 그걸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거다. 생계, 먹고사는 일의 엄중함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나의 밑천을 다시 우두커니 바라볼 생각을 하니 좀 쫄린다.
나의 시간과 영혼을 규칙적으로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살아온 지금까지와 다르게 (비교적) 나만이 세상에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싶다. 그걸 잘 찾아서 다듬어놓는다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든 다른 일을 하든 내가 덜 휘청거릴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서른아홉 살의 나는 예전보다 나를 더 많이 좋아하고 갑작스럽게 사방으로 뚫려버린 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내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해로운 것을 멀리하는 결정을 할 수 있고, 어쩌면 나의 무기가 될 수 있는 밑천을 들여다볼 시간 또한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또 다른 자신감이 된다. 이제야 인생이라는 난이도 있는 저글링을 조금은 해볼 수 있게 된 걸까. 녹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느낌은 자꾸 든다.
잘 생각해 보자. 그래서 나는 뭐가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