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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Jul 31. 2023

중요한 것은 (대차게) 꺾여본 마음

이게 해보니까 꺾이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지

정확하게 두 달, 길지 않았던 한량 생활의 마지막 날이다. 말로는 장남으로서의 부담감이 없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한량처럼 시서화와 술을 즐기며 적당히 기방 놀러 다니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 허세다. 이미 15년 차 직장인 패치가 몸에 붙어버린 것인지 온갖 연차와 주말을 다 갖다 붙여 쓸 수 있는 2주 간의 휴가기간이 지나면 좀이 쑤셔온다. 늘 말로는 백수다, 놀았다, 놀고 있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정말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마냥 놀아본 기억이 없다.


넷플릭스도 하루이틀이지 내가 무슨 박찬욱도 아니고 영화를 보면 얼마나 본다고. 책도 마찬가지다. 원래 책도 바쁜 일상 가운데 하던 일을 외면하고 몰래 봐야 쪼는 맛이 있지 막상 여유가 있으면 활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여행도 시큰둥했다. 절친 키미의 진단으로는 '뭔가 너를 옥죄는 것이 없어서 간절함이 없다'라고 하던데 그 말도 맞다. 사실 여행의 기쁨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고 기분을 쇄신(너무 딱딱한 것 같은데 리프레시라는 표현이 별로 맘에 안 든다)하는 것인데, 딱히...?


오히려 친구 회사에 가서 일을 슬슬 도와주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과 마음이 더 편했다. 주구장창 집에 있어봤자 더 답답하다는 걸 겪어서 알고 있으니까. 요즘은 나에게 편안한 것을 찾아가게 된다. 어리고 기력이 넘쳐 주체하지 못할 때는 편안한 것을 늘 멀리하고 고생을 사서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물론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귀찮고 피곤한 나머지 편안함을 찾게 되는 것도 있지만 예전에는 뭔가 고생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좋게 해석하자면 많이 배우고 경험하고 싶었고 나쁘게 해석하자면 미련했다.


우리 아버지 세대에나 있을 법한 고생서사를, 이 장르를 내가 왜 굳이 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숱하게 삽질하고 꺾이면서 배운 것도 있다. 나에게만 적용되는 편안함의 인덱스랄까. 너무 많은 불편함을 겪으면서 오답노트를 10권째 만들다 보니 그래도 웬만하면 잘 틀리지 않는 유형 몇 개는 발견한 거다. 똑똑한 친구들은 순서가 반대였겠지. 스스로에게 편안한 것을 먼저 갈망하고 찾으면서 그것들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을 텐데 나는 또 이렇게 굽이굽이 돌아간다. 멍청하면 손발이 고생해야지. 답이 있나.


그래도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라는 말처럼 나의 부러진 자국들이 그렇게 서럽거나 억울하지는 않다. 내 기준, 말과 행동에 억울함이 묻어나는 사람이 제일 못생겨 보이는데 일단 그 계열은 피해 가서 다행이다. 물론 가끔은 열받고 울컥할 때가 있어서 '갱년기가 벌써 왔나'하고 개그를 쳐야 할 때도 있지만 가족, 친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정말 무탈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만 해도 큰 축복이라고 늘 생각한다. 꺾어진 마음을 울면서 다시 일으켜 세울 때는 나 혼자 아등바등 고독한 싸움을 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새로운 시작은 나에게 늘 두근거리고 짜릿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좀 겁이 난다. 새로운 회사에 적응할 게 뭐가 있냐, 탕비실하고 화장실만 어딨는지 알면 되는 거지 하고 호언장담하던 개망나니 멍청이(=나)가 좀 그립기도 하지만 또 꺾여버릴지언정 꾸역꾸역 해보고 책임지고 아니다 싶으면 털고 하는 새로운 회전목마에 다시 한번 올라타야 할 때가 왔다. 이제는 내가 회전목마 관리도 해야 해서 더 쫄리지만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부디 오늘의 이 기록이 내가 좋은 선택을 했다는 편안함의 기록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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