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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Feb 19. 2024

시댁 없는 며느리가 설에 받은 수라상

엄마의 손맛

2018년 가을부터 나는 명절에 찾아갈 시댁이 없다. 시부모님 모두 1년 차이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시아버님은 2017년 봄, 갑작스레 폐암 진단을 받으시고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투병을 하시다가 평소 성품대로 조용히 댁에서 숨을 거두셨다. 시어머님은 연속되는 폭염으로 힘들었던 2018년 여름, 뇌출혈로 쓰러지시며 갑자기 돌아가셨다.


연이은 부모님의 상(喪)을 치르며 신랑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 워낙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나와 아이 앞에서는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님 상을 치르던 이튿날 밤, 조용히 나누던 우리의 대화 속에서 신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난 정말 고아네."

"아, 고아... 그렇지만 나랑 시아가 있으니까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알지?"

"그래 알지...."

"우리 아빠, 엄마가 당신 부모님 대신해서 더더 잘 챙겨주실 거야. 그러니까 든든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응 그래, 고맙다."


이전에 그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고아'라는 단어를 나의 가장 가까운 짝꿍인 남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심장이 아파왔다. 칠순 때 선물해 드린 가방을 받고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불과 몇 달 후의 우리는 왜 여기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님을 잃은 슬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왜 올해도 상복을 입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애통했다.


명절이 되면 다들 시부모님 찾아뵙는 이야기로 웅성웅성할 때 나는 할 말이 없다. 시어머님이 우리 엄마는 아니라 당연히 나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시간들이 이렇게 흐르고 보니, 신기하게도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예뻐해 주셨던 그 진심만 오롯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명절이 다가오면 시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아파온다.


이런 연유로 나는 명절이면 오직 친정에 가기 위한 짐만 싼다. 칠순이 넘으시도록 우리 가족 먹이려고 며칠 전부터 바리바리 장 본 음식들로 요리를 해 놓으셨을 친정 엄마를 생각하면 죄송하고 마음이 짠하다. 하지만 그 정성을 받지 않는 것 또한 엄마를 서운하게 하는 일이란 걸 잘 알기에 반은 사 먹고 반은 엄마가 해주신 음식을 먹자고 나름의 명절 룰을 만들지만 역시나 연휴 내내 집밥을 계속해주시는 엄마는 정말 못 말린다.


친정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반. 배고프겠다며 엄마는 양념에 재워놓은 윤이 자르르 흐르는 LA갈비를 불판 위에 올리셨다. 시아가 좋아하는 숙주나물 무침, 짭짤한 고추양념무침, 고소한 참기름 내음의 미역 줄기 볶음, 신선한 양배추 샐러드, 시원한 물김치, 칼칼한 포기김치는 이미 세팅이 되어 있었다. 우유 한잔씩만 마시고 나온 우리 가족은 정말 아무 말 없이 열심히 먹기만 했다.

연휴 첫날 점심 밥상


저녁에는 역시 윤기 나는 LA갈비와 기름향이 식욕을 자극하는 동그랑땡/생선 전, 탱글탱글 잡채, 짭조름한 파김치, 얼큰한 육개장까지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저녁 밥상


다음날인 구정에는 주먹만 한 만두가 들어간 떡만둣국과 물김치, 잡채, 전이 나왔고 쫄깃한 가래떡과 육즙 가득한 고기만두의 꿀조합이 입 안에서 올레(olé)를 외쳤다.

연휴 둘째 날 아침밥상


설 점심에는 요리하느라 수고하신 엄마를 위해서 처음 외식을 했다. 집에서 30분 정도 차로 가면 온갖 꽃으로 장식이 된 퓨전 한정식집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먹은 정식은 언제나 정갈하고 맛이 좋아 엄마도 연신 맛있다며 행복해하셨다.

양상추 샐러드, 칠전판, 탕평채, 호박죽
해파리냉채, 소갈비찜, 누룽지탕
홍어 오징어 초무침, 떡갈비, 요플레 크림새우
기본 찬과 된장찌개, 돌솥밥


아침, 점심을 푸짐하게 먹어 저녁은 거를 만도 한데 집에서는 입맛이 별로 돌지 않더니 친정 엄마의 밥상은 무슨 마력을 지닌 건지 역시나 푸짐하게 한 상 또 먹어버렸다. 새롭게 나온 부들부들 순두부 양념장과 초록초록 시금치무침, 새콤달콤 오이 초무침식욕을 더욱 자극했기 때문에.

저녁 밥상


거하게 먹은 다음날 아침엔 느끼한 속을 달래라고 담백한 두부를 넣은 칼칼 된장찌개와 색깔부터 맛있는 계란찜, 봄에 먹는 향긋한 달래간장과 싸 먹을 마른김, 고사리까지 추가된 3종 나물무침을 차려 주셨다. 자꾸 이러시면 안 되는데, 엄마 힘드신데 왜 이렇게 계속 메뉴를 바꿔가며 내주시는 건지 마음은 죄송하면서도 밥은 계속 입에 넣는 우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넷째 날 아침 밥상


양심상 이날 점심은 피자를 배달해 먹었고 드디어 모두에게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나 저녁은 패스하고 윷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더니 엄마께도 휴식 시간을 좀 드린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떠나는 날 아침, 엄마는 우리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 식사라며 다시 한번 LA갈비를 구우셨고 겨울이라 달달한 뭇국과 쫀득한 탕수육, 감칠맛 나는 오징어숙회, 몰랑몰랑 청포묵무침, 아삭아삭 무말랭이 무침을 새롭게 내오셨다.

다섯째 날 아침 밥상


우리가 짐을 싸는 동안 엄마는 주방에서 분주히 싸줄 음식들을 가방에 넣고 계셨다. 요리 잘 못하는 딸이 솜씨 있는 엄마 반찬들로 며칠이라도 맛있게 잘 연명하라고 그렇게도 꾹꾹 눌러 담으셨나 보다. 집에 와서 모두 풀어놓으니 전쟁터에 나갈 비상식량처럼 양이 엄청났다. 그렇게 5일 밥상을 차려 주시고도 우리에게 싸줄 반찬들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엄마가 싸주신 음식들


내가 요리에 별 관심이 없고 잘하려고도 안 하는 이유는 다 친정엄마 때문이다. 이렇게 요리를 다양하고 맛있게 잘하시고 또 바리바리 다 싸주시니 내가 만들어 먹을 생각을 못하는 거다. 엄마가 못했으면 내가라도 만들어 먹을 궁리를 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엄마에 대한 감사함을 에둘러 툴툴대본다.


신랑은 매 명절마다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날에는 부모님이 유독 더 보고 싶을 텐데.

그래도 장모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항상 한입 가득 복스럽게 잘 먹어주는 남편을 보면 참 고맙다. 시부모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우리 아들 이렇게 잘 먹어 기특하다고, 우리 며느리 입 짧은데 배부르냐고, 우리 손녀 이렇게 잘 먹어서 쑥쑥 크는 거냐고 흐뭇해하셨으면 참 좋겠다.


조만간 아범이랑 시아랑 같이 어여쁜 꽃다발 들고 호국원으로 찾아뵐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버님,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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