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몇 주 전의 일이다. 요즘 테니스를 배우고 있는데, 코치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이 날따라 통화가 길어졌고, 코치는 내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치 씨는 어떤 사람 좋아해요? 연예인 중에 한 번 얘기해 봐요."
"네? 저는 얼마 전 해를 품은 달이란 드라마에 나왔던 김수현 같은 사람이요."
"주변에 그 정도의 사람은 없는데, 혼자 살아야겠네. 저는 그 이상형의 몇 퍼센트 정도 돼요?"
"글쎄요. 70%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순간, 이 코치에게 함께 테니스 레슨을 받고 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연애가 하고 싶지만, 코치는 엄마와 매주 보는 사람이라, 괜히 사적인 관계로 얽히기 싫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몇 초간의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코치의 말이 이어졌다.
"신치 씨, 테니스 잘 가르쳐줄 테니까,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와요. 그럼 재미있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아, 네. 그러면 저야 너무 감사하죠. 잘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다시 사무적인 대화로 마무리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계속 그 사람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마치 헤세가 격정의 키스를 나눈 그녀가 집에 가려는 그를 '현명하게 굴라'며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차를 타고 나가는데 알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서 물끄러미 집에서 나오는 불빛을 밤새 지켜봤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문자를 보내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다음 달 회비 문제로 다시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이번에는 훨씬 더 사무적으로 통화를 하고 끊었다.
금요일 오후 불금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다. 학교 선배에게 맥주 한 잔 하자는 문자를 보냈으나, 퇴짜를 맞았다. 코치가 생각났다. 결국 나는 문자를 적었다.
"코치님, 소개팅 얘기 아직 유효한가요? 그러면 저 소개팅 해 주세요~"
하지만 곧 지워버렸다. 소개팅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가 진짜 소개팅을 해 준다고 하면 난감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가끔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코치님, 혹시 사는 동네가 어디세요?"
"어!! 양재동이요. 왜요??"
"아. 그러시구나. 그냥 근처 살면 친하게 지내려고요. ㅋㅋㅋ"
"어디 사시는데요?"
"봉천동이요."
"^^ 친하게 지내요~"
"ㅎㅎㅎ. 네! 다이어트 끝나면 연락 주세요. 맥주나 한잔 해요~"
"ㅎㅎㅎ 네~"
이렇게 며칠을 고민하던 문자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졌다. 아마 이 문자마저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헤세가 다시 그녀를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녀의 집 앞에서 세 달간이나 서성였던 그때와 같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연애를 하고 싶은 요즘이다. 내게도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 주면 좋겠다. 단테처럼 평생을 잊지 못하고, 그의 일생에 영향을 준 '베아트리체'가 될지, 에밀 싱클레어처럼 방황의 중간에 잠시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지만 곧 다시 나에게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줄 '베아트리체'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단테보다는 싱클레어에게 나타나 주었던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는 어떤 베아트리체를 찾고 있는 것일까? 오늘 테니스를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라디오에서 들었다며 배우자 고르는 4가지 방법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돈을 보고 선택하지 말 것,
두 번째는 그 사람의 명예나 지위를 보고 결정하지 말 것,
세 번째는 오래 봐온 사람들 중에 찾아볼 것,
마지막은 인생의 목표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
들으면서 나 역시 공감했다. 그저께 만난 선배가 생각났다. 그 선배가 "나도 연애 안 한지 오래됐어. 요즘은 돈을 못 벌고 있어서 누굴 만나지를 못하겠어. 너 같으면 나 같은 사람 만나겠냐?" 그때 내가 대답했다. "선배? 괜찮지. 좋은 사람이야. 돈? 돈이야 뭐, 내가 벌면 되지."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선배를 생각해 봤을 때, 마지막 질문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남자와 세상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너무 싫은 여자. 만날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오래 알아 온 사람들 중에 괜찮은 사람들이 많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Amor Amatur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랑받는 것"이라고 적었더니, 친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사랑하고 있나?"
"사랑하고 있지. 나 자신을. 연애하고 싶다."
"이젠 연애하고 싶냐? 외롭구나?"
"응. 그런가 봐."
"꼬이는 남자들은 없냐? 너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자나."
"묘한 매력. 그래서 그런가. 꼬이는 사람들이 이상해. ㅋ"
"멀쩡한 사람들도 종종 있었잖아. 종종."
"그러게 아주 가끔"
"기회 올 때 잡았어야지."
"앞으론 잡아 봐야지."
"항상 떠나고 나면 후회한다니까."
"내 말이."
"너 주위에 잘 찾아봐 있을 거야. 인연은 멀리 있지 않다더라."
"그래. 가까이서 찾아봐야지."
"이런 난 진해라서 멀리 있는데 안타깝구먼. ㅋㅋㅋ"
"ㅋㅋㅋㅋㅋ 대박. ㅎㅎ"
"넌 대박을 놓친 거야."
"그렇다고 하자. ㅎ"
"아니다. 꼬시러 갈 테니 넘어와라. ㅋ'
"됐다. ㅋ"
이렇게 찐 우정의 남사친과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오래 알아 온 사람들 중에 괜찮은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인데, 네 번째 조건이 맞았던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같은 곳을 보고 갈 수 있는 사람."
나는 어디를 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다 보면 '아, 이 사람이구나'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완전히 같은 사람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어떤 부분들을 조금은 양보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는 대상이 될 '나'보다 '스스로'를 먼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물론 나 역시 '나'를 먼저 사랑해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베아트리체'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