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꾸 눈물이 나. 마음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올라와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마음이 물렁물렁해져서 울기도 해.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아무 느낌도 없는데 눈물이 혼자 나오고 있어.”
거실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운 날, 작은 아들은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따듯했다. 그러나 고백하듯이어진 아들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작인가.
4개월 전, 축구 선수의 꿈을 위해 아들이 야심 차게 들어간 유소년축구단은 개개인의 욕망으로 혼탁한 곳이었다. 아이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 또한 시간과 돈을 저당 잡히는 것이 당연했다. 부모들은 조직 내에서의 내 아이의 입지를 매의 눈으로 살피고, 아이를 용의 꼬리로 둘지 뱀의 머리로 만들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현재 속한 축구단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듯 했지만, 실은 언제라도 다른 FC로의 이동을 염두해 두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정보력과 순발력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이가 원하는 것을 시켜주고 그것을 구실 삼아 중학교 때부터는 공부에 전념시키려는 부모와(실은 나도 비슷한 희망을 품었음을 고백한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술렁술렁 축구부를 이어가서 최종적으로 예체능 대입 특혜라는 빅픽쳐에 이르는 방법까지, 이미 각자가 그려둔 아이의 미래가 있었다.
지도자들은 지도자대로 한창 훈련을 통해 실력을 키워 가야 할 어린아이들을 매주 경기에 뛰게 하여 실적을 쌓고자 했다. 필드에서 감독이 아이들에게 퍼붓는 삿대질과 욕설 앞에서 부모들은 침묵했다 - 나를 포함해서. 대한축구협회가 제작하고, 선수들이 필수 수강해야 할 교육영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신고대상’의 예로 제시된 것이 현실에서 그대로 자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이제 겨우 시작했고, 원래 예체능은 그런 거니까, 이 과정을 견뎌야 한다니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나도 아이도 ‘적응’ 해 나갔다. 경기에서는 이기는 것만이 중요했고, 팀 내에서는 실력이 뛰어난 아이가 권력자였다. 이기는 날도 지는 날도 경기를 뛰는 우리는 모두 소중하고 원 팀이라는 의식은 손흥민이나 22년 전의 히딩크 감독에게서나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은 그로부터채 두 달이 되기도 전에 터졌다. 경기도 외곽에서의 일주일간의 합숙 동안 기존 아이들의 신입 군기 잡기와 심각한 폭력 문제가 발생했고, 그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운영진과 기존 부모들의 처신에 나는 또 한 번 크게 실망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이제 막 펼친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며 일단 계속해 보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구덩이에 빠진 아이를 방치하는 듯한 상황 속에서 이도 저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번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잘해 보고 싶다는 자신의 말과 다르게 두려움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다음 달 있을 또 다른 합숙에 대한 공포가 아이를 짓눌렀고, 아이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엄마 아빠 앞에서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구단은 문제시되었던 기존 선수 아이들에게 훈계조차 하지 않았고, 우리 아이를 포함하여 새로 합류했던 아이 셋은 그만두었다. 우리 아이는 다른 FC로도 전향하지 않았다.
축구 선수로 알려진 아이가 축구를 그만두게 되자 학교의 짓궂은 아이들 몇이 축구를 못해서 잘렸다며 아들을 놀려댔고, 가뜩이나 세상을 호되게 맞게 돌아온 아이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으로 채워졌다. 나는 아이에게 “친구들에게 그냥 행복하게 축구하고 싶어서 관뒀어,라고 말하면 되지”라고 얘기해 줬다. 얼마나 속 편하고 무심한 대처였던지. 그 말은 애매모호하고 루저스러운 변명으로 들리기 충분했으리라. 차라리 “폭력을 당해서 나 포함해서 새로 들어온 애들 모두 관뒀어”라고 명확하게 말하게 했어야 했다.
아들에게 이번 일은 충분한 경험 후 깨끗하게 포기한 꿈이 아니었다. 떠나온 축구단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원망과 두려움 등 아이가 가질 복잡한 감정이 가늠되어 마음이 아득해졌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우리 아이는 ‘투머치’로 운동을 잘하는 아이였다. 체육 시간에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에서 뛰어났고, 운동이라면 적당히가 안 되는 아이였다. 그런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 눈에는 때에 따라 얄미워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 점심시간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당연하듯 하곤 했던 학교 친구들과의 축구 타임도 아이들에게 몇 번 바람을 맞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렇게 여기도 저기도 애매해져 버린 아이는 돌연 의기소침해졌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친구들과 노느라 깜깜해진 후에야 땀범벅이 되어 들어오는 아이였다. 극한 외향인이라 교우관계는 단 한 번도 걱정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집돌이가 되었다. 팔딱팔딱 뛰던 에너지가 없어지고, 난생처음 배가 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소파에 몸을 뉘인 채 희미한 미소를 띠고 티비 화면에 집중하는 아들의 모습은 어김없는 퇴역 장교였다.
“친구들이 노는데 혹시 껴줄까 싶어서 매일 눈치를 보면서 주변을 뱅뱅 돌아. 그런데 같이 놀자고 하고선 맨날 자기들끼리 놀고 있어. 이제 더 물어보기도 싫어. 애들 너무 싫어. 다 패버리고 싶어. 때리고 싶지만 매일 참아.”
“가족도 있지만 난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어.”
친구에 대한 갈급함과 원망. 전형적이었다. 사. 춘. 기.
“학교에서 속상하면 빨리 집에 가야지, 가서 울어야지, 그 생각만 해. 그리고 엄마한테 얘기해야지 생각하면서…” 아이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왕 울음을 터트렸다. 누워있는 상태로 아이를 폭 껴안았다.
“내가 흑인이야? 자기들은 다 백인이고? 나만 자기들이랑 달라? 나만 왕따야? 나는 친구가 없어!” 5년 전, 큰 아들은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친구들을 저주했다. 뜬금없이 백인 흑인을 운운하며 소설을 썼다. 전형적인 과민반응. 세상의 중심은 나. 초등학교 5학년. 사춘기의 시작이었다.
작은 아이를 안아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쳤다. 아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관계에 대한 안타까움, 한창 몸과 마음이 급성장하면서 서로서로 부딪힐 열두 살 아이들, 그 아이들과 매일을 헤쳐나가야 하는 담임선생님, 그리고 아직 큰 아이도 진행 중인데 둘째까지 사춘기가 왔다는 현타…
동시에 친구가 있던 없던 개의치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이 녀석들은 왜 이렇게 친구에게 목을 맨단 말인가……!
“엄마가 나를 위로해 줘서 좋아.”
30여분을 울고 눈이 팅팅 부은 아들이 내 품을 파고들었다. 큰 아이와는 어렸을 때도 이런 스킨십을 해 본 적이 없다.
“엄마한테 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친구관계가 참 어렵다, 그렇지? 화나고, 속상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런데 아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아들이 많이 자라 있을 거야. 엄마는 아들 옆에, 뒤에 꼭 붙어있을게. 힘들 때 엄마한테 기대.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그리고 어느 날 아들이 친구들과 가까워져서 바빠지고 엄마로부터 멀리 가버리면 엄마는 또 아들 기다리고 있을게. 힘들면 엄마한테 또 와.”
진심이었다. 그 시절 큰 아이한테는 해본 적 없던 말.
그래, 사춘기 까짓 거. 살살 달래서 가보지 뭐. 그러다 훅 들어오는 펀치에 맞고 쓰러지면 할 수 없고. 또 일어나지 뭐. 오늘은 이렇게 잘 마무리했으니 내일은 내일의 날을 지내보자고.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