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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Sep 26. 2024

29. 엄마 혼자 행복해도 될까

끝나고 나서야 시작된 이야기

(거의 마지막 연재글이라 내용이 깁니다^^;;;)


#1. 서울, 여왕을 그리며

“우리 나라에서는 매년 최고의 산을 뽑아. 그리고 저 산이 바로 그 거야. Mountain Queen.”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 다음 마을까지의 3시간이 넘는 드라이빙. 운전석의 아이슬란드 아저씨가 저 멀리 산 하나를 가리켰다. 눈앞의 수많은 산중에서도 유독 산 하나가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여왕. 그녀는 이름처럼 압도적이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장엄하면서도 고요했다. “Queen이 있으면 King 산도 있겠네요?” “아니, 우리에게 왕은 필요 없어. 여왕만 있으면 돼.” 소름이 돋았다. 중부에서 동부를 오가는 하이웨이를 달리며 나는 여러 번, 여러 각도에서 여왕과 마주쳤고, 그때마다 그녀를 배경으로, 아니 함께 사진을 찍겠다고 우겼다. 그렇게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 정도를 앓았다. 누군가는 평소 운동 부족인 내가 정신력으로 버텼을 거라며, 이제 그만 가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알 것인가? 아이슬란드에서의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하루 종일 걸어도 폴짝폴짝 뛰는 기분이 들었다. 만일 아이슬란드에서 객사라도 했다면 망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앓았던 이유는 어쩌면 기존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자각과, 그로 인한 마음의 아픔이 반영된 것이지 않을까. 자잘한 일상 속에서 나는 그 여왕 산을 자주 떠올렸다. 그녀의 근엄한 자태와, 그런 그녀를 넋이 빠진 듯 응시하고 있는 내 모습을.


 

#2. 야외 온천도, 오로라도 없던 여행

여행을 다녀온 후 지인들은 나의 여행기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내 여행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소를 훑는 과정이 아니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멈추고,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가성비가 떨어지고 시시할 수도 있는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이슬란드의 필수 코스인 블루라곤에 가지 않았다. 백야인 계절에 갔기 때문에 오로라도 보지 못했다. 그밖에 또 놓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아쉬운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음에도 혼자 갈 것이고, 또 걷거나 버스를 탈 것이다. 나는 혼자 여행의 맛에 대해 알아버렸다. ‘매력’ 혹은 ‘마력’이라는 단어는 ‘나 홀로 여행’에 써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다시 갈 것이다. 시기는 현재 고1인 큰아들이 열아홉이나 스무 살이 되는 2년 내지 3년 후로 생각하고 있다. 그때는 더 오래 머물 것이다. 그동안 책을 한 권 내서 그것을 포트폴리오 삼아 예술가들을 위한 숙소인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지원하고, 그렇게 몇 주간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다. 난생처음 그런 욕망을 품게 되었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저렴한 비용으로 예술가들에게 주거를 겸한 창작 공간을 제공하는 제도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여러 나라에서 적용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에 여행 온 여러 청년들이 언급한 WORKAWAY라는 근로 형태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나는 겨우 강아지나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 있는 정도의 인간이지만, 농장 일도 도전해 보고 싶다. 엘리자 리드가 주도하는 ‘아이슬란드 작가 워크숍’에도 참가하고, 매년 9월에 레이캬비크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문학 축제에도 가보고 싶다.




#3. 진정한 독립을 꿈꾸며

18일. 짧은 기간일 수 있지만 그간의 여정은 나의 내면에 강슛이 되어 꽂혔다. 여행을 하며  나는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고 싶었다. 치유 받고 싶었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어쩌면 그 정도의 기대치였다. 그것만으로도 흡족했으리라. 그런데 꽤나 서툰 인간이라고 여겨왔던 내가 아이슬란드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독립’이라는 맹랑한 단어. 치안적으로 안전하고, 외국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없고, 서툰 영어가 잘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돈을 벌며 여행을 할 수 있는 나라라면? 이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민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아이슬란드에서만큼은 혼자 살 수 있겠다, 라는 엄청난 용기를 얻게 되었다. 물론 짧은 경험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 아들들의 독립이 아닌(물론 그것도 간절히 꿈꾼다), 내 스스로의 단기 독립을 꿈꾸게 되었고, 실행을 계획 중이다. 어떻게?  



#4. 반성하지 않겠다는 다짐 

두 가지 상반된 연재를 하고 있다. ‘아들 둘 엄마의 대한민국 탈출기’와 ‘아들 진짜 싫다.’ 이건 뭐 '지킬 앤드 하이드'의 엄마 버전도 아니고. 두 연재를 넘나들며 감정의 슬라이드를 타다 현타가 오기도 한다. ‘아들 둘 엄마의 대한민국 탈출기’를 통해서는 큰 에너지, 무한 기쁨, 충만함을 느끼고, ‘아들 진짜 싫다’를 통해서는 분노, 통곡, 반성, 인내, 겸손, 사랑(해야지 싶은 다짐), 책임감, 혹은 어쩔 수 없는 결연함이 올라온다.  


지인을 만나 나의 아이슬란드 여행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그녀는 썰을 푸는 내 모습을 보더니 진짜 당신의 모습을 보는 거 같다고 좋아했다. 그러다 그녀가 물었다.

“당신의 달라진 모습을 본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나의 아이슬란드 행이 가져온 긍정성이 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기라도 했던가. 남들 앞에서는 달뜬 얼굴로 아이슬란드의 추억에 대해서 떠들다가도 귀가하는 순간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앵거(Anger)가 되어 버리고 마는 나 자신인데. 그러니까 아이슬란드에서의 경험만으로는 가족들에게 하트를 날리기에는 역부족했나 보다. 다시 생각해보았다. 에이, 그렇게 쉽게 변화가 일어날 일이었으면?


잠시 멈칫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죄책감을 느낄 뻔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만일 남편이라면 혼자 여행을 다녀온 후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까? 아이들에게 친절해졌을까? 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느꼈을까? 에이 말도 안 되는! 그럼 죄책감을 버리자.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그냥 나 혼자 행복했던 걸로! 휴우, 반성할 뻔했네. 깜짝이야.



#5. 지지고 볶는 삶은 계속된다

여행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그렇게 얼마 전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아른거리는 그 시간이 많이 그리웠다. 때로는 잡고 싶어서 가만히 손을 내밀어 보기도 했다. 어떤 기억은 벌써 희미해져서 가까스로 떠올려야 했다. 그럴 때면 마치 한쪽 몸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 망연자실했다. 가만히 앉아 이 여행의 시작점으로 걸어가 보았다. 거기 우리 아들이 있었다. 내가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나. 내 여행 이야기에 아들 이야기가 빠졌구나. 아들 생각이 안 났구나. 혹은 아들 생각이 조금 났지만 나는 담담했구나. 항공표를 지르고 여행을 준비하는 8개월 동안 어쩌면 나는 ‘오직 아들 생각’이라는 늪에서 조금씩 기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슬란드가, 도서관 행사를 준비하며 함께 으쌰으쌰 했던 그 여인네들이, 내 내면의 아주 작은 불꽃이 나를 끌어냈구나. 그리고 어쩌면 나는 나만의 온전한 여행 이야기를 쓰고 싶었나 보다. 간절히 나이기를 원했나 보다. 어쩌면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나였을 텐데.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고 짠, 하고 가족이 변할 일은 당연히 없고, 그렇다고 내가 짠, 하고 변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아들과 티격태격하며 종종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다. 하지만 이제는 쓰러질 때 쓰러지더라도 꾸역꾸역 일어난다. 쌍콤하고 가뿐하게 일어나지는 못한다. 얼굴을 찡그리고 욕지거리도 우물거린다. 그렇게 이상을 일상에 녹여내지 못했다. 그냥 그 둘이 나란히 간다. 그럼에도 예전에는 일상이 이상을 자주 훼손시켰다면 이제는 꽤 분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법 기특해진 내 자신이다. 아들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엄마인 나 자신에 대한 저격으로 끝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 그 지긋지긋한 반복. 이제는 안 하련다. 물론 잘 지켜야 한다. 일상이 이상을 집어 삼키지 않도록. 아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행위인 읽고 쓰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그런 시간 씀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이제 나는 내 인생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바빠졌다. 브라보.


나는 더이상 뒤로 넘어지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앞으로만 넘어질 생각이다.

≪이번 한 번은 살려드립니다≫



#6. ‘중년’이라는 단어를 ‘한창때’로 바꾸면 어떨까*

"저렴한 숙소라는 배경에는 젊은이라는 등장인물이 어울리나 봐."

사카이 준코의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의 한 문장을 읽으면서 괜시리 심통이 났다. 아니 그게 왜 젊은이들의 전유물인데? 젊다는 게 뭔데? 그럼 중년은 고급스러운 호텔 라운지에 앉아 커피만 홀짝이고 있어야 한다는 건가? 그게 우아한 중년의 모습인가? 인정한다. 다인실 숙소가 일반적인 아이슬란드라고 하지만 그곳에서 40대 중반의 중년 배낭여행자는 나뿐이었다(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다). 독일인 부부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별도 룸을 이용했고 배낭 여행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인실에서 묵은 경험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였다. 나보다 스무 살이 어린 사람들. 그들은 내 아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 아들 이야기는 먼 나라 한국의 과거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나의 과거는 그들과 무관할 뿐이었다. 덕분에 엄마라느니, 중년이라느니, 심지어 여성이라는 기존의 틀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연장자와 연소자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 섞이자, 나는 평소의 약간 화난 듯, 표정 굳은 아줌마가 아니라 왠지 좀 발랄해진 소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가도 은근슬쩍 다인실에 스며들 것이다. 여성 전용 4인 혹은 6인실이 딱 좋았다. 아, 그때에는 하이킹 용 대형 배낭 말고 편안하게 캐리어를 밀고 가겠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1인실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탕 목욕을 하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천천히 나아가겠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갈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도 갈 곳이 많이 남아 있어서 좋다.



#7. 다시 가도 아이슬란드

모든 이에게 아이슬란드 행을 적극 추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멀고, 돈이 많이 든다. 내가 간 5월은 날씨가 좋았지만, 보통 겨울은 길고, 한겨울에는 매우 춥다. 따뜻한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예술과 볼거리, 먹거리를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아이슬란드는 의아한 나라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꿈꾼다. 한국에서는 2023년에 기준,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나라’ 2위에 아이슬란드가 랭킹 되었다. 왜일까? 여행이 나의 일상과 완전히 다른 낯선 곳으로의 여정이라면 아이슬란드는 바로 그러한 곳일 것이다. 특히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인구밀도 면에서 우리와 반대편에 있는 아이슬란드에 가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한국이라는 좁은 나라에서 살며 체화된 좁은 감각.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던 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깨달음. 게다가 태곳적 그대로의 거친 자연 속으로 한걸음 들어서는 것은 낯설고도 압도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들판을 홀로 걸으면서 나를 직면했던 순간들, 다인실에서 지내면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나눴던 소중한 대화, 히치하이킹을 통해 만난 현지인들. 혼자도, 함께도 좋은 나라, 고독하되 고립되지 않는 나라. 가성비 보다는 압도적인 가심비로 단박에 나를 무장 해지 시킨 나라. 나는 다시 가도 아이슬란드로 갈 것이다.



#8. 나만 없는 우리 집을 꿈꾸며

굳이 아이슬란드가 아니어도 좋다. 18일이 아니어도 좋다. 사실 3주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경우는 운 좋게도 재택근무 중이었고 휴가를 몰아서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날 시간적, 경제적, 상황적 여유가 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질렀다.


가능한 기존의 나의 정체성과 마주치지 않는 곳이면 좋겠다. 한국인이 드문 곳이면 더 좋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인근 나라면 어떨까. 미리 항공권을 지르자. 그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되고, 일상은 설레기 시작한다. 조금 더 견뎌진다. 의사소통이 걱정된다면 국내 여행을 시도해 보자. 나 홀로 1박 2일도 좋겠다. 나만 데리고 가자. 나를 대접하자. 새로운 환경에 놓아 주자. 그리고 여행 중 나만의 작은 미션을 시도해 봐도 좋다. 나의 경우는 뜻밖의 도서관 행사가 잊을 수 없는 여행을 만들어 주었다. ≪나만의 여행 책 만들기≫에는 ‘버스 타고 여행하기’ ‘현지에서 요가 클래스 듣기’ ‘한복 입고 촬영해보기’ 등의 예가 언급되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그렇게 모든 엄마가 사소한 일탈을 하는 그 날을 감히 꿈꿔본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이렇게 일상의 일탈, 아니 꿈이 쌓이다 보면 행복이 허무하리만치 가까이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지도.**


아들들과 남편은 엄마와 아내의 부재에도 생존했다. 훌륭하게 잘 지내고 있더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 사고는 없었다. 집이 폭발하지도 않았고, 라면만 먹지도 않았다(또 그럼 어떤가?). “생각보다 시간 빨리 갔네? 더 있다 와도 되겠어?”라는 남편과 큰아들의 반응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엄마의 부재 상황은 그들에게도 ‘엄마 없어도 살 수도 있다’라는 값진 경험을 안겨 주었다. 정정한다. 저 문장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어쨌든 꽤 괜찮은 시도였다. “아이들은 시간이 오래 걸려요. 특히 남자애들은 더. 스물 세네 살쯤 되어야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하고, 서른이 넘어야 부모에 대해서 돌아보더군. 그러니 길게 보고 그냥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줘요. 답답하면 지금처럼 이렇게 혼자 바람 쐬러 나오고. 잘하고 있어요! 그러고 여행 후 집에 가서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면서 애들을 꽉 안아주면 돼요. 엄마 없다고 안 죽어!” 여행 중 만난 미국 할머니의 유쾌한 말을 나는 일기장에 꾹꾹 눌러써 두었다. “They won’t die.”





#9. 최소한의 엄마

‘엄마 됨’은 엄청난 일이다(고귀한 일이라며 무조건 칭송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냥 ‘엄청나다’고 에둘러 표현하겠다). 그럼에도 나란 존재를 설명하는 유일 무일한 것도 아니다. 나란 사람을 설명하는 많은 텍스트 중 나는 엄마라는 역할을 잘 하지도, 흥미로워 하지 않음을, 이제 턱을 치켜 뜨고 똑바로 말하겠다. 여행을 통해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엄마가 아닐 때의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그 자각이 너무 또렷해서 스스로에게 딴지를 걸 수가 없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최소한의 엄마’를 추구해 보려고 한다. “오늘부터 엄마 안 해!”라는 선포가 아니다. 사실 그러고 싶다. 절규하듯 원한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쌓인 설거지 거리며(나는 지금 주방의 난잡한 식탁 한 구석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세 시간 후면 하교해 먹을 것을 찾을 작은 아이며(현관문 여는 소리가 제일 무섭다), 오늘 저녁 거리 걱정이며(냉장고문을 열 번 열어봤지만 뭘 해 먹어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틀 후의 시아버님 생신 걱정과, 그 와중에 생각해보니 나는 직장인이고, 언제나처럼 회사 일이 밀렸다는 자각, 그 밖의 것들이 나를 최소한의 엄마로 만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엄마가 되겠다는 선포는 엄마로서 습관적으로 위축되는 내 자신에 대한 꾸짖음이며, 그 단어를 심장 정 중앙에 박아놓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두 아들이 성난 훌리건처럼 나에게 야유를 퍼부을 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이미 최소한 아니냐며…. 마, 아직 멀었어! 반성해야 돼!



#10. þetta reddas(떼타 레다스트), 결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집중할 시기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럼 나란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되묻고 싶다. 나를 위한 시간을 유예할 수 있는 거냐고 물으며 으르릉 거릴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아이들만큼, 아니 가장 중요한 내가 있다. 조금은 간지럽지만 이 말을 꺼내보겠다. “나는 내 스스로의 팬이 되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엄청나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르시스트가 아닌 이상 스스로를 유난스럽게 애정 할 일이 있단 말인가? 그냥 지금의 나를 안고 끌고 때로는 발로 툭툭 차면서 이 인생길을 갈 뿐이지. 그러나 여행을 통해 나는 꽤 사랑스러운 나를 보았다. 꿈꾸는 나를 보았다. 불꽃 같은 에너지를 보았다. 나는 나란 인간이 재미있어졌다. 나를 키워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좋아하게 된 그 경험을 잊고 싶지 않다. 팬이 되겠다는 것은 일종의 선포다.





덧. 끝난 후에야 시작된 이야기

남편     “카페 갈 때 쿠키 가져가. 심심하잖아.

나       “(빠직)심심? 내가 지금 유유자적 놀러 가는 줄 알아? 초 집중하러 간다고. 중간중간 시간 확인하면서. 그 시간에 글 쓰고 독서하고 다 해야 한다고. 한 대여섯 시간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딱 두 시간이니까.”

남편     “두 시간 갈 거면 왜 가?”   

나        “…… 숨 쉬러.


나는 괜시리 남편에게 역정을 냈다. 버텨보겠다. 고귀하고 우아하게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소란스럽고 지저분하게.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이 두렵지 않다는 건 아니다. 별 수 있나 부딪혀 봐야지 뭐.


“추잡하게, 존나 지저분하게 버텨주시면 좋겠어요.”
이반지하에게 예술이란 “타인의 세계를 보고 그걸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버티지 않으면 이걸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예술만 남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고결하고 순결하게 버티지 말고, 추잡하게 버티셨으면 좋겠어요. 내 작품 헐값에 팔았다가 후회도 해보고, 영화라면 ‘나 독립영화만 할 거야’ 했다가 상업영화 가서 돈도 좀 벌어보고 막 타협했다가 그런 거. 추잡하게, 존나 지저분하게 버텨주시면 좋겠어요.”
-     이반지하 인터뷰 중


(저 문장 앞에 ‘엄마로서’를 붙여 보시라!)


* ≪친애하는 미스터 최≫에서 인용

**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인용


이제 마지막 연재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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