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든 위엄이든 1도 없는 엄마인 나는 아침 아홉 시가 되자마자 부리나케 학교와 은행에 전화를 걸어 청소년증이나 학생증의 당일 발급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굽실굽실. 결과는 물론, 안 되지. 잠시 고민했다. 출근을 째고 시청으로 날아간다. 아, 그전에 당장 아들에게 여권용 사진을 찍게 한다. 거금 오만 원을 들여 1회만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여권을 만든다. 오후 1시까지 송파의 시험장으로 날아간다…… 쯧.
그렇게 오늘 아들은 학교와 미용 시험을 쿨하게 쨌다.
꼭 닫힌 아들의 방문에 공허한 시선을 던진 후 집을 나왔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시간, 상사에게는 이미 연락을 해 두었다. 오늘은 야근이군. 출근길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벌레 같아. 그… 쪼그맣고 톡 건드리면 동그래지는 거.
무표정하게 창 밖을 응시하다 떠오른 그거. 공. 벌. 레.
누가 톡 치기만 해도 1초 만에 몸을 말아버리는 콩알만 한 녀석. 건드리기만 해 봐, 내 몸을 세상에서 가장 조그맣게 만들어 버릴 테야. 내 안은 소심함과 두려움으로 헐떡거리지만 밖은 딱딱하게 만들 거야. 세상은 내게 말하겠지, 야 콩알, 너 뭐 하냐? 뭐라는 거야? 안 들려.
오늘 아침도 나는 그렇게 우울해졌다. 창문에 기대며 공벌레처럼 움츠렸다.
‘천재작가 김나정’
스마트폰에 뜬 이름에 가만히 폰을 들었다.
“잘 지내세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
우리는 작년에 온라인 글방에서 만났다.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다. 그녀의 글을 읽고 심상치 않은 내공을 감지한 나는 그녀가 수년간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독서토론모임을 진행해오고 있으며 그 기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공부를 해온 사실을 알고 탄식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신비롭고 입체적인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천천히 친해지며 혼자 기뻐하고도 싶었다. 나만의 그녀로 숨겨두던 어느 날 그녀가 대단한 문학상을 받으면 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짠 하고 나타나 맨 앞에서 축하해 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때부터 내 폰에 저장된 그녀의 이름은 ‘천재작가 김나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글방에 올린 내 글에 울음이 묻어났는지 그녀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따로 연락해 본 적은 없는 사이.
“제가 있잖아요. 얘기할 사람이 필요할 땐 저한테 전화하세요.”
아들에 대한 나의 푸념을 한참을 들어주던 천재작가는 그렇게 다정스럽기까지 했다. ‘바로 뒤에 있어요.’ 내 멋대로 그렇게 들렸다. 만난 적이 없다. 멀리 떨어져 산다. 아주 가끔 연락한다. 그럼에도 거기 그녀가 있음을 안다. 마음으로는 언제나 내가 달려갈 수도, 그녀가 달려올수도 있음을 안다.
2050년에 전 세계의 90퍼센트가 사막화가 된다는데, 인구 절반이 물 위기에 처한다는데 미용시험 한번 못 본 게 무슨 대수야. 버스에서 내리며 좁디좁은 마음길이 조금 펴졌다. 그렇게 공벌레의 몸도 조금 펴졌다.
오늘도 불쑥 나타난 인간 안전망의 도움으로나는 별다른 심리적 탈선 없이 하루를 보냈고,효자 아들에게서 받은 깜짝 글감 선물로 무사히 글을 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