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 - 종교의 소리
새해 처음 들은 소리의 길흉화복
한국의 오랜 풍습 중에는 '청참(聽讖)'이라는 풍습이 있다. 설날(음력 1월 1일)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로 그 1년의 운세를 점치는 것. 특히 까치 소리를 들으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고. 까마귀나 참새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된다고 믿었다. 아마도 까치는 쥐 등 해로운 작은 짐승이나 곤충을 잡아먹으니 풍년에 도움이 되고, 까마귀는 검고 음침하다는 오명에, 참새는 곡식을 먹으니 흉년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사실 어떤 소리를 정월 초하루 아침에 들었는지 보다도 우리 선조들은 왜 '소리'로 한 해의 운명을 가늠했는지가 더 신기하고 특이하다.
처음 들은 소리가 한해의 귀벌레(earworm) 효과(26화-새우과자 속 노래하는 벌레 참고)를 일으키는 것일까? 꽤 낭만적인 이 풍습이 사실은 심리적 효과 측면에서 더 유용했던 것 같다. 새해 첫날 첫소리가 현실을 바꾸거나, 미래를 예고할 순 없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한 마음의 준비, 그게 긍정의 의지든 부정의 대비든, 그 마음 자체가 소리로 한 해를 준비하고 다짐하는 ‘청참'의 의미 아니었을까?
길흉화복과 바람과 절망을 소리로 만나는 것은 결국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사람이 죽거나 아프면 꼭두를 만들고 상여소리로 망자를 떠나보낸다. 그 노래엔 삶 이후의 일들과 죽은 자와 가족을 위로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불가에서도 소리가 종교의 핵심 메시지, 이야기를 담는다. 종과 북 운판과 염불 심지어 묵언 수행의 커다란 “청취-들음 “을 통해서 듣는다. 들을 수 있어야 만나는 종교의 가르침! 소리가 들릴 때 마음은 문을 연다.
비로소 서로 아이의, 엄마의, 이웃의, 상사의, 부하의, 친구의, 결국 타인의 입장이 들리면 비로소 “그랬구나~”하며 내 마음이 들리고 그 마음이 섞인 대화가 시작된다. 그때의 말은 삶을 움직이고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듣는다는 위대한 힘의 결과다.
소리종교와 종교소리
불교는 특히 소리종교라고 한다.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수업 시간에 배운 중요한 것들도 모두 소리를 내어 그 종교적 의미를 전한다.
2012년 송광사 새벽 예불의 소리를 취재하기 위해 새벽 두 시 반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발걸음 소리와 깊은 새벽 산이 뒤척이는 소리를 함께 녹음하며 멀리 도량석(산과 절과 모든 생명을 깨우는 목탁소리)이 들리고 예불이 시작되자 소리는 파도치고 밤 산사는 바다가 되었다. 스님들과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예불을 드린 신도들이 돌아가도 사찰은 소리로 가득했다. 새들은 환생이라도 한 듯 지옥의 마지막 한 영혼을 구할 때까지 고행을 감수한다는 지장전 앞에서 스님의 기도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관음전”이었다. 관세음보살을 따르고 섬기며 기도하는 곳인데, 한자를 풀어보니 “세상의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소리를 본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여기서 보다는 보살피다의 뜻에 가깝고 소리는 고통소리, 고행의 소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중생을 보살피는 곳이지만. 내 마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눈앞에 그리는 곳으로 들렸다.
미션 스쿨을 다닌 경험 때문일까? 기독교와 가톨릭에서도 소리는 중요하다. 노래와 노래의 형태인 기도로 예수의 말씀과 성서 속 하느님의 복음, 복된 소리를 맞는다. 그 공간은 작은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설계되었다. 세계적 건축가인 승효상, 이타나미 준, 안도 타다오의 손길은 그런 소리들을 도면에 이미 그려놓았다.
물론 이 교회의 소리구조(sound design)는 과거 동굴에서 인간이 경험한 신비로운 소리 체험이 바탕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그 공간을 채우고 비우는 사람들의 행위가 오히려 소리의 가치를 결정한다.
텅 빈 교회당, 텅 빈 성당에 앉으면 내 몸의 작은 소리도 섬세하게 들린다. 그 큰 공간을 채우던 신부와 목사와 합창단의 말소리 노랫소리가 사라지면, 내 숨소리 조차 커진다. 그렇게 소리 없는 빈 공간에서 한 참을 기다리면 마음이 들린다.
가볍게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 창밖의 새소리, 바람과 건물이 살을 맞대는 소리... 그런 작은 소리들보다 더 작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면, 일상과 삶을 명령하고 따지던 큰 소리가 사라진다. 비로소 마음은 들린다.
종교는 삶의 가장 예민한 살갗아래 흐르는 핏줄 같다.
이미 답을 갖고 있지만 아무도 답을 듣지 않기에 수천 년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 인간이 만든 불상과 고상 십자가의 모습으로, 한 손은 말하고 한 손은 듣는 부처와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귀를 기울이는 예수는, 오늘도 소리 없이 소리를 들려준다. 들으라 하며 답을 말해준다. 소리가 없어야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