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노란 꽃 02화

볼펜 심

by 문창승

기념품으로 받아 애지중지하던

고가의 볼펜 한 자루

각지고 투박한 인상과 다른

진하고 부드러운 그 감각에 놀라

없어선 안 될 깊은 사이로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점차 헤어짐의 때가 다가옴을 알았어도

더 남았다 속이며 손에서 놓지 않은 채,

그렇게 잉크는 무심히 당연하게 흘러나가

글자는 어느덧 힘주어 눌린 자국뿐


아직은 끝이 아닐 거란 기대감으로

이리저리 서성이다 간신히 찾아낸

제조사의 리필용 볼펜 심 하나

그렇게 다시 채워질 시간을 그리며


투명히 식어버린 그것을 비틀어 빼내고

희망의 손끝으로 끼워 넣는 새 볼펜 심

추억이 다시 현재로 깨어나리라 약동하는 심장과

그럼에도 끄떡 않고 늘어진 주검


새로운 심은 끝내 새로운 숨을 불어넣지 못하고

추억은 그새 더 멀어져 역사가 되려는 가운데

낙담한 동공 아래에 떨어진 듯 놓인

텅 빈 몸통 그리고 들어맞지 않는 혈액, 그 새까만


부들거리는 손이 힘겹게 다가가는

잡동사니 가득한 낡은 서랍 한 칸

미련으로 죽음을 미루는 그 더러운 낙원에

얌전히 추락하는 그들의 그림자


눈앞의 저 쓰레기통은

끝끝내 못 본 체로

나중에 혹시라도

만에 하나의

언젠가는

어쩌면

keyword
이전 01화목이 마른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