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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어쩔 수 없는 풍경이 된다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아침이 밝는다. 며칠 전 구조를 바꾼 방은 아직 낯설다. 낡은 커튼, 먼지 쌓인 창, 오래된 어둠을 뚫고 햇빛 몇 줌이 들어온다. 한 달 혹은 일 년. 커튼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전이다. 매번 다른 아침을 기대하지만 어둠과 빛, 더운 공기, 그리고 차가운 바람만이 저 오래된 커튼과 창을 뚫고 들어온다

아침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만든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모든 것들이 흐릿하다. 209. 강렬한 직관이 흐릿함속에 부정한 수치 하나를 던져놓는다. 돌처럼 단단했던 직관이 무너진다. 수치에 약해지지 말자. 그러나 수치에 당당한 아침이 드물다. 그럼에도. 이 아침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고요 속에서 나 홀로 속 시끄럽다.

배고픔인지 허전함인지 모를 공복감이 나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쓸데없이. 차가운 아침의 실존은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부터 온다. 데카르트의 역설. 나는 생각함으로 존재하는 게 하니라 존재하기에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냉장고를 열어 무엇을 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방에서도 종종 섬처럼 고립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 겨울의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강렬함은 시간이 흐른 뒤에 색을 더한다. 일상. 그 치열함에서 기억해야 할 강렬함은 많지 않다. 며칠 전이다. 길 위에서 심장이 멈춰버린 사내를 보았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구급차와 경찰차도 있었다. 사람들이 사내를 둘러쌌다. 구조대원이 사내의 심장에 압박을 가했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격렬한 몸짓이다.


찰나를 사이에 두고. 와르르. 낯선 사내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여기는 갤럭시. 그리고 가속도로 멀어지는 우주의 사멸. 사내는 어떤 운명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든다. 하지만 지금 사내는 자신을 구경하는 존재를 모른다.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 관류되지 못하는 의식과 몸을. 누군가는 전화를 할 테고 누군가는 털썩 주저앉겠지. 그때의 나처럼. 지금은. 저 사내에게도 나에게도 얄궂은 운명이다.
화석화된 의식과 몸짓. 내 몸짓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내 의지가 아니다. 몸속에 붉은 혈액이 관류하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도로의 차량들. 사내와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하다. 관류되지 못하는 혈액과 관류되지 못하는 의식. 사내는 전부를 잃었고 나는 하나를 잃고 있다. 서서히. 그러나 부분은 전체를 좌우하기에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


사람들이 쓰러진 사내 주위로 점점 몰려든다.


"그냥 가던 길 가세요."


찰나는 순간에서 영원으로 향한다. 영원은 끝없는 찰나의 연속. 공간이 무너지면 시간도 무너진다. 빅뱅 이전의 시대로 돌아간다. 경찰관 한 명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제지한다. 나는 일부러 사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에.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 남는 건 또 다른 세계다. 나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 쪽으로. 열 시 오십오 분. 스탠더드 차타드 은행의 보도블록. 사람과 사람들. 보이진 않지만 그들이 남겨둔 발자국. 슬픔은 어쩔 수 없는 풍경이 된다.


2016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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