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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May 13. 2024

[우울 이야기] 그 드라마 당장 멈춰

비교? 남 탓? 좋아요 해봅시다


*저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한(?)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아니 자주 욕이 입에서 슬며시 흘러나온다. “시발….” 주로 혼자 있는 시간에 그렇다. 머리를 감다가, 운전하다가, 심하면 당근을 썰다가, 책을 읽다가. 누군가 우울증 환자의 뇌를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 기억 중 안 좋은 것만 추출해 편집한 다음, 걱정거리 콘텐츠를 양산해서 만든 연속극을 특별방영 중인 상태’라고. 내 안에는 흑역사 콘텐츠가 차고 넘쳐 언제나 새로운 연속극이 순식간에 제작되고 불쑥불쑥 방영된다. 


이런 심리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가 ‘반추’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 시점에 반복적으로 떠올라 후회와 슬픔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는데, 나는 과거에서 자꾸 현재 문제들의 원인을 찾아내려 집착하고 그것을 대단한 통찰인 양 여긴다. ‘아, 이런 일 때문에 내가 이런 성격으로 자란 거였어.’ ‘아, 그때 이렇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찌질한 나.’ 해봤자 현재와 상관없이 실수와 잘못과 무지를 되뇌며 자신을 못난 놈으로 채찍질하는 일일 뿐인데.


죄책감을 느낄 때,


“OOO도 살아있다.”


라는 인터넷 격언이 도움이 된다. (OOO에는 비도덕적이기로 유명한 인물을 넣으면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세상엔 커다란 잘못을 하고도 끈질기게 반성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나는 그보다 일을 쳐도 훨씬 작게 저질렀고, 월등히 깨끗한 방법으로 근근이 돈을 벌고 있는데. 흠. 내 과오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계속 살아도 될 것 같다. OOO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겠는데? 때로는 ‘내가 쟤보단 낫다’라는 비교가 삶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무례한 타인에게 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백예리의 노래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를 패러디한 문장을 떠올린다.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닐 거야) 다 네 잘못일 거야."


내 경우엔 무례한 타인은 주로 학생과 학부모였다(맨날 보는 이들이 그들이므로). 다양한 유형의 그들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교육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직이 이어질수록 나름대로 대처가 노련해지긴 했지만,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내가 모자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고, 일의 마무리에 실패해 교실의 기강이 무너지면 우울했다. 하지만 선빵을 날린 건 그쪽이다. 나는 졸지에 뺨을 얻어맞았을 뿐. 그래, 걔네가 이상한 거야. 때로는 강력한 남 탓이 삶에 도움이 된다.

 

정호승 시인의 시 <산산조각>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부서진 건 부서진 거고, 시간을 되돌릴 순 없다. 침울하게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을 뇌 내에서 돌리며 부서진 원인을 찾고 잘못의 크기를 재어본들 뭐가 달라지나. 조각난 부처상을 흠 없이 붙일 수 없고, 끝나버린 연속극의 결말을 바꿀 수 없다. 본방송을 사수해야지, 재방송을 자꾸 봐서 무엇하리. 머릿속 연속극에서 주연인 나를 응원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그래도 내가 낫다.’하고 등장인물들을 재평가하고 마음에 안 드는 드라마를 방송편성표에서 빼버린다. ‘부처상을 조각낸 건 내가 아닐 거야, 아마도 너일 거야.’라고 뻔뻔하게 나가본다. 우울의 되새김질, 반추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다. 


우울보다는 햇살을 들이켜는 게 좋다.




*참고자료: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3031502237#google_vign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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