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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효선 Jan 28. 2022

직감과 감각

폭력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카페<잔원>

나는 직감이 남들보다는 좋은 편인 것 같다. 과학적인 확률 싸움으로만 보면 그냥 우연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커플 사진을 보면, 이 커플이 오래갈지 헤어지게 될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둘이 결혼할 거 같은데? 하면 결혼하고… 둘이 잘 어울리지만 왠지 뭔가 헤어질 것 같아 하면 정말 헤어진다. 그런데 내 예상을 뒤엎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결혼한 커플도 있으니까. 역시 우연일 확률이 높은 건 지도…

직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사진으로 특히 잘 느끼는 것 같다. 공간 소개 글을 좋아하는데 사진을 보면 그 공간의 분위기가 확 와닿을 때가 있다. 마음에 드는 공간 사진을 저장해 두었다가 직접 그곳에 찾아가 보면 역시 나와 너무 잘 맞는 분위기다.

오늘은 서울 온 김에 잔원이라는 작고 아담한 카페에 왔다. 공간 사진과 소개 글을 보고 첫눈에 강한 끌림을 느낀 곳이다. 나는 나무 장식을 좋아한다. 잔원은 책상, 의자, 책장 등이 짙은 빛깔의 나무로 되어있고… 곳곳에 따뜻한 색감의 예쁜 조명들이 조용히 각 자리를 비추고 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공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테이블 위에는 문학과지성사의 시집과 옛 책들이 놓여있다. 커피와 디저트는 나무 포크, 도자기로 만든 접시와 잔으로 아주 정갈하게 내어졌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 같은데 요즘 이런 구조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카페가 많아진 것 같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참 좋다. 차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좋을 것 같다. 날이 저물자 어둑한 분위기에 조명의 밝기는 더욱 따뜻하고 강렬해지는 것 같다.

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 직접 내린 고소한 커피도 맛있고 디저트로 주문한 찰보리빵도 커피와 잘 어울리는 담백한 맛이다. 특히 커피가 담긴 도자기 잔이 예뻐서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비슷한 잔을 한참 찾아볼 정도였다.

카페<잔원>

내 감각을 믿기까지 오래 걸렸다. 나는 나의 감각을 믿지 않았다. 틀리면 혼났던 경험 때문인가. 누구나 미성숙하고 서툴렀던 어린 시절에 망신을 자주 당했다. 그게 말이 되니?, 넌 진짜 좀 이상해,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냥 외워, 그 밖에 자주 매우 창피스럽다는 듯한 경멸하는 듯한 눈빛…

폭력의 상흔이란 참 잔인한 것 같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다는 건, 생각보다 큰 공포이자 고통인 것 같다. 내 몸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킬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몸과 세포에 깊게 새겨져 거기서 벗어나더라도 지나치게 자기를 보호하려 든다. 나는 자주 누가 나를 공격하거나 때릴 것 같은 생각을 한다. 특히 누군가 내 뒤에 있으면 그 생각이 한층 강해져 신경 쓰이고 불안해진다. 언제나 반사적으로 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 생존을 위해서 저 사람이 나를 때릴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때리지 않을 안전한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 온 감각을 동원했을 것이고 그것이 내 직감과 감각이 발달한 이유인 것 같다.

내 생각과 의지로 행한 일로 두들겨 맞으면 그것들을 멀리하게 된다. 마치 내 생각과 의지가 위험한 존재인 것처럼.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억누르고 깊은 불안과 무기력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 삶은 괴로움이라는 공식을 만든다.

카페<잔원>

나를 때리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주먹으로, 말로, 어떤 물건으로도 맞지 않은 지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내 감각을 온전히 느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마녀의 주술에서 풀려난 것만 같았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드러나듯 나의 감각을 마비시켰던 불안과 무기력이 걷히고 그것이 되살아났다. 삶은 기쁨이 되었다.

감각은 없던 적이 없었다. 뜨겁고, 차갑고, 향기롭고, 냄새나고, 무덥고, 상쾌하고, 축축하고, 뽀송뽀송하고, 보드랍고, 푹신한 늘 거기 있던 모든 감각들이… 나에게 기쁨이 되었다. (통증마저 더 이상 크게 두렵지 않다. 주사 공포증이 많이 나아졌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걷히자 삶에 대한 의지도 되살아났다. 아, 삶은 얼마나 살아볼 만한 것이었던가. 우리는 어찌하여 스스로에게 삶의 기쁨을 선물하지 않는가.

폭력의 트라우마로 온 사방이 어둡고 고통만이 가득한 당신의 세계에 한줄기 빛이 슬며시 비출 그날을 위해 살아남기를 기도한다.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은 더욱 환하게 빛난다. 곧 그 빛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Ps. 그날은 어떤 감각으로 알아챌 수 있는데, 서른 살, 혼자 떠난 여행 중 어느 아름다운 카페에서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차가운 감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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