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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효선 Jan 30. 2022

대가 없는 사랑의 대물림

할머니의 사랑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좋다. 내가 완전히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진 느낌은 아니지만 그저 그 자리에 알맞게 있는 기분이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 의문이 아닌 당연한 것이 된 느낌.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그리고 좀 다행스러운 마음도 든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한다.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쉬지 않고 하루 종일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달려야 한다면 그것은 잔인한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간 속에 있는 느낌은 무형의 끈으로 모든 것들이 연결된 듯한 느낌이다. 조급함이 사라지고 어지럽던 마음이 비워진다. 찰나지만 이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인생이 우리에게 늘 온화하지만은 않다는 걸 안다. 때로는 무섭도록 잔인하고 변덕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인생내게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도 결국은 다 내가 만든 것이다.

인생의 얼굴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 같다. 잘못이 없을 땐 굳이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고, 할 일을 마쳤다면 좀 쉬어도 된다. 내가 편안하면 인생도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다.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나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좋다. 억지로 강요하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다음에 반드시 이거 해야 돼’라고 몰아붙이고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거스를 수 없는 원리,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 예를 들어 계절의 흐름,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죽는다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작은 희망을 느낀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순식간에 변하는 인간의 감정과 물질적인 것들에 삶을 기대는 것은 너무 안일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낱 인간. 자연 속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인 인간.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좋다.


사랑받고 싶은 인간.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한없는 연민을 느낀다.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들 자신 속에 늘 머물러 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편안해지기를. 웃을 수 있기를. 스스로를 미워하고 모질게 대하지 말기를. 우리는 채찍보다 포옹을 택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기를… 지금 이대로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를.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던 시절에는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스스로를 채찍질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언제까지고 억지로 꾸역꾸역 해야만 이 만한 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느 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런 일들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하고 싶은 일로 삶을 채워 나가도 살아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싫어하던 일도 더 이상 심하게 싫지 않아 졌다. 싫어하는 일 자체가 많이 없어졌다.


오롯이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쌓아 나가면서 나를 알아가고, 내가 점점 좋아지고, 많은 것들을 허용해주고, 고요에 포근히 몸을 맡긴다.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스스로를 벌주고 비난할 때도 있지만 예전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많이 좋아졌는지 평온한 시간을 누릴 때마다 깨닫는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많이 고맙다.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줘서. 나에게 자유를 선물해줘서.


난 스스로에게 그렇게 각박한 감독관은 아니다. 채점할 때도 후한 편.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신에게도 너그럽고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남에게도 너그럽다.

이런 마음의 여유는 어디서 온 것인가 생각해보니 나를 향해 미소 짓는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대가 없는 사랑. 할머니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다. 무언가를 잘할 때만 예뻐해 주시는 게 아니라 항상 예뻐해 주셨다. 그 느낌이 참 좋았다. 나는 예쁜 사람이구나. 나의 모든 면은 가치 있고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구나… 왜 아기나 강아지나 고양이를 볼 때 먹고, 자고, 싸고 하는 당연한 모든 것들이 예뻐 보이는 것처럼 할머니는 나를 그렇게 보아주었고 그와 같은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다.

조건과 이유 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건 사실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유 없는 사랑을 의심하거나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고마워한다.


할머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증오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작은 것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짓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타인에게 갖는 대가 없는 사랑의 마음은 할머니의 품, 손길, 미소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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