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등하원 효과
(10/13 발행 시 실수가 있어 재발행합니다. 소중한 라이킷, 댓글 주셨던 작가님들 진심으로 감사하고 죄송해요)
1년 전, 아이의 언어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내 안에는 우울의 그늘이 드리웠었다.
과도한 미디어 노출, 무관심, 방치—다 내 탓이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내 몸이 가루처럼 부서져 지구에서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홧김에 아침부터 아이와 한 시간을 걸었다. 그 여운을 잊지 못하고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걷고 또 걸었다.
적당히 체력을 소모한 덕분일까, 아이와 마주하는 루틴을 만들었다는 안도감의 효과일까. 걸어서 등하원을 시작하고부터,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개운하게 일어나는 날이 생겨났다. 죄책감의 늪에서도 서서히 벗어나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하며 걸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 세 달… 아이의 말이 트이는 만큼, 꽉 막혔던 내 마음도 조금씩 트였다.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사실은, 나를 위해서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마마차리 한 대가 옆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미나짱 마마. 오랜만이에요."
"죠죠는 요즘도 걸어서 다녀요?"
"놀라지 마세요. 저희, 걸어서 다닌 지 벌써 일 년이 넘었어요."
"와, 죠죠짱 정말 대단하다! 우리 애는 5분도 잘 안 걷는데. 우리는 자전거 없으면 어린이집을 퇴소해야 할지도 몰라요."
하기는, 아이는 여느 두세 살 친구들처럼 두 팔 벌려 '애미야 안아라'를 시전 하거나, 다리 아프다, 힘들다며 징징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대로, 말을 안 듣고 떼를 써서 "너 자꾸 그러면 내일 버스 타고 간다"라고 협박하는 일은 있었지만.
넘쳐나는 체력을 다스리는 힘을 길러주고 싶은 마음에, 동네 체조교실을 등록했다.
3살 반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잘 놀다가도 선생님이 호명만 하면 망부석처럼 굳어버리는 아이, 엄마아빠에게 달려가 수업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이, 나 자신과 전쟁하듯 수업 내내 낮은 포복으로 돌아다니는 아이…
친구들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체조교실 안을 날아다녔다.
한 달 후, 첫 레벨 테스트가 끝나고, 코치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어머니, 죠죠가 혹시 다른 운동을 배웠었나요?"
"아니요. 이게 처음이에요."
"기본적인 체력도 좋은데, 다리 근육, 지구력이 아주 월등해요. 방금 여섯 살 아이들과 시합을 했는데도 지지 않더라고요.
운동능력의 발달이 또래보다 적어도 2년은 빨라요."
1년 전 소아과에서 말이 9개월 이상 느리다는 말을 들었던 아이가, 이제는 말을 곧잘 하고 체조교실에서는 운동 능력이 2년 빠르다는 말을 듣는다.
'이것도 걸어서 등하원의 효과인가?'
매일 걷는 길인데도, 아이의 기분에 따라 유독 오래 걸리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 아이는 동네 구석구석을 다 찍고도 부족했는지, 갑자기 호코라(祠:신이나 불상을 모셔 둔 작은 신전, 사당)에서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서 집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날은 그렇게 돌아서 돌아서 한 시간 반 만에 집에 도착했다.
'아오 다리야…
대체 얼마나 걸은 거야.'
수년만에 휴대폰에 있는 건강 어플을 열어 보았다.
-TODAY 17,002 steps
내 눈을 의심했다. 오늘은 1만 7천 보, 어제는 그나마 옆길로 새지 않아서 9,998보, 그저께도 만 보를 넘었고, 지난주도, 지난달도…
몇 주전,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날이 20,120보였으니까…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가 잃었던 말을 되찾고, 단단한 몸을 만들며,
그리고 나의 마음까지 다잡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