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정호승 <지푸라기>

by 지나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 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png



절망이란

한 사람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그 순간부터

진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마음이

마침내 주저앉고 마는 날.


그날은 꼭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소한 무게 하나가

그동안 버텨오던 균형을 깨뜨리고

삶 전체를 무너뜨려버린다.


이제 끝이라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꺼져가는 그 순간.


지푸라기는 그 자리에 있다.

묵묵히,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지푸라기는

벼의 마지막 흔적이다.

쓸모를 다한 줄기,

남은 알맹이 하나 없이 버려진 채

길가에 흩어져 구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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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지푸라기 하나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 된다.


그래서 지푸라기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말한다.

“기다렸어요.

당신이 나를 잡고

다시 일어서주길.”


세상에는

‘쓸모 없음’이라는 말로

버려진 존재들이 있다.

사람도, 기억도, 한때의 열정도

어느 순간 필요 없어진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가장 무력한 것 같았던 존재가

가장 큰 힘을 줄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아닌 줄 알았던 내가

누군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고 확실한 발판이 된다면?


그때,

우리 삶은 다시 시작된다.


시인의 시선은

무너진 사람을 향해 있다.

주저앉은 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손 내미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강요하지 않는다.

도와주겠다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다.

지푸라기 하나처럼.

잡힐 수 있게.

붙들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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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위로는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그 단단한 기다림이다.


지푸라기는 나약해 보인다.

바람에 휘청이고,

먼지 속에서 잊히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날,

그것은

단단한 흙벽돌로 변한다.

허물어진 삶의 외벽을 다시 세우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


누군가를 살게 했던 존재로

기억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믿는다.

내가 별거 아니라는 말은

끝까지 맞지 않는 말이라고.


나는 누군가에게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지푸라기일 수도 있고,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흙벽돌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숨죽인 눈물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내밀 수 있는 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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