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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킴 May 18. 2024

슬로리딩은 작가를 온전히 파악하는 일(3)

3. 문리가 트인다

 책을 만권을 읽으면 문리(文理)가 트인다고 했다. 문리가 트인다는 말은 대체 어떤 말인가. 문리란 사전적 의미로 ‘글의 뜻을 깨달아 아는 힘’,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힘’을 뜻한다. 이 말인즉 글을 잘 읽고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옛 선비들은 문리를 트기 위해 지독하게 책을 읽었다.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실학자 정약용은 학습을 통해 문심혜두(文心蕙竇)를 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심은 글자 속에 깃든 뜻과 정신이고, 혜두란 ‘슬기 구멍’이다. 열심히 익히면 어느 순간 슬기 구멍이 뻥 뚫려 열린다고 했다. 슬기 구멍이 뻥 뚫린다는 것은 문리가 트이는 것과 동의어이다. 읽은 책이 쌓이면 쌓일수록 머리 안에서는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책을 제대로 읽으면 머리 안에서 읽었던 지식이 그 종류에 따라 분류가 된다. 지식 간 유사성과 차이점이 파악된다. 여러 지식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한 양상, 그 것을 조망하는 다양한 관점이 머리에서 정리된다. 자신이 익혀왔던 지식을 계통적으로 재조직화 하는 것이다. 머리 안에서 지식 체계가 형성되면, 자신의 강점과 약점, 보완해야 할 부분과 강화되어야 할 부분이 명확히 보인다.     


 자신의 지식 체계를 단단하고 치밀하게 쌓아올린 사람은 시야가 남다르다. 치밀하게 조직된 지식 체계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현상 너머의 것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하나의 현상을 보고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본다. 편향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생각한다. 상식적이고 보편적 판단, 합리적으로 사고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었음에도 능력이 차이 나는 건 머리 안에 축조된 지식 체계의 차이 때문이다. 우수한 원자재를 많이 확보했음에도 엉성하게 지식의 누각을 쌓아올린 사람이 있다. 반대로, 적은 원자재를 갖고도 빈틈없이 치밀하게 쌓아올린 사람이 있다. 이 차이는 글을 이해했지만 자신의 지식 체계 안으로 제대로 편입시키지 못한 것에서 온다.     


 정약용이 말한 혜두(蕙竇), 슬기구멍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제대로 편입했을 때만이 뚫린다. 편입되지 못한 지식은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학습을 할 때는 지식의 이해와 더불어 지식 체계를 파악해야 한다. 어떻게 설계되고 축조된 지식인지를 알면, 그 체계를 답습하여 연결과 확장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 체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지식을 이루고 있는 설계도를 보고, 사고 체계를 통째로 흡수하는 것이다. 만약 명저를 쓴 저자의 사고를 통째로 흡수한다면 나 또한 수준 높은 사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명저에는 대량의 사고가 들어있기에 흡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불가능은 없다. 느리게, 매일 쉼 없이 읽어나가면 된다. 일생을 걸어 써내려간 명저들을 단박에 읽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 것이 가능하다면 저자보다 지적 수준이 우위에 있거나, 이해를 못하며 책을 읽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명저들을 구성하는 치밀한 지식 체계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학습에도 유리하다. 모든 지식은 일정한 체계를 갖고 있으며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새로운 분야의 학습도 능히 잘할 수 있다. 슬로 리딩은 글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기도 하지만, 글의 길을 추적하며 작가가 구상한 지식의 설계도를 따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한 번 그려본 설계도는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책을 보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설계도와 대비해가며 깊숙이 파악해 나갈 수 있다. 학습에 유리한 머리로 변화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지식 체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람에게 주체적인 학습은 어렵다. 그들은 타인이 만든 지식을 수동적으로 배울 뿐이다. 느리더라도 책을 읽으며 저자가 책을 써내려간 설계도를 따라 그리는 사람은 자신만의 설계도를 잘 그릴 가능성도 높다. 마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수많은 유명 건축가의 설계도를 베껴가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계 구상했던 것처럼.       


"그냥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도면이나 드로잉을 베끼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도판을 기억해 버렸을 정도로 르 코르뷔지에 건축도면을 수없이 베껴 보았다."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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