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일찍 끝난 오후, 영실은 동아리방 한쪽 구석에 앉아 기타 줄을 퉁기고 있었다. 기타 소리는 비어 있는 학생회관을 울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영실아, 너밖에 없니?”
숨을 몰아쉬는 공대 학생회장 대영이었다.
“네, 다 수업 들어갔어요.”
“넌 수업 없어?”
“오늘은 끝났어요.”
“그럼 나랑 같이 좀 가자. 사람이 너무 부족해.”
“어디요?”
“일단 나와.”
운동장으로 향하는 길. 바람이 세게 불었고, 먼지가 얼굴에 닿았다.
“너 윤금이 씨 살해 사건 알지?”
“아니요, 처음 들어요.”
대영의 얼굴이 굳었다.
“작년에 미군 병사가 스무 살 여성을 잔혹하게 죽였어. 그런데 우리나라가 힘이 없으니까, 그 놈을 제대로 처벌도 못 하고 있어.”
“......”
“택시 기사들은 미군 승차 거부하고, 상인들도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을 하고 있어. 근데 대학생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럼 우린 뭘 하는 건데요?”
“미 대사관 항의 방문. 오늘 고대가 선봉에 선다. 우리가 먼저 일어나야 다른 학교들도 따라와.”
영실은 목이 말랐다.
“저... 전 시위 같은 거 무서워요.”
“두려워할 필요 없어.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는 게 진짜 무서운 거지.”
잠시 멈춘 대영이 영실을 바라봤다.
“만약 네 누나가 그 피해자였다면?”
그 말에 영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이 휙,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잠시 후 시위 현장에는 수백 명의 학생이 모였다. 고대의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SOFA를 개정하라!”
“미군은 철수하라!”
구호가 점점 커졌다. 영실도 그 속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엔 떨리던 입술이, 점점 단단해졌다.
시청 앞. 수십 대의 전경버스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매서운 햇빛 아래에서, 대영이 손을 높이 들었다.
“지금이야!”
순간, 학생들이 차도로 뛰어들었다.
“미군은 철수하라! SOFA를 개정하라!”
영실은 대영의 뒤를 바짝 따랐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그때, 쾅—!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최루탄이 터졌다.매캐한 연기 속에서 학생들이 기침을 했다.
눈물이 쏟아지고, 코가 막혔다.
“영실아, 뛰어!”
대영이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곤봉이 날아들었다. 대영이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형!”
영실이 달려들었지만, 사복경찰의 발길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모든 게 아수라장이었다.
비명, 구호, 욕설, 연기.
영실은 그 속에서 대영의 손을 놓쳤다.
유치장 안은 눅눅했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 수십 명이 구석에 모여 있었다.
“영실아... 미안하다. 나 때문에.”
“괜찮아요, 형. 근데 언제 나가요?”
“모르겠어. 며칠은 더 있을 거래.”
이튿날, 총학생회 간부들이 면회 왔다.
“동지들! 구속자는 총학생회장이 맡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은 며칠 더 구류를 살다 나가게 됩니다.
학교에서 모금한 빵과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빵을 나누어 받으며 영실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무섭지만, 이 순간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유치장에는 한 가지 지옥이 있었다.
냄새.
화장실엔 벽도 문도 없었다. 누가 볼일을 보면, 그 냄새가 곧바로 유치장 전체를 덮었다.
학생들은 물이 내려오는 간격에 맞춰 ‘시간표’를 정했다.
“딱 물 내려가기 직전에 싸자!”
하지만 밤이 되자 누군가 규칙을 깼다.
고요한 새벽, 한 학생이 배를 움켜쥐고 일어섰다.
“형님들… 죄송합니다. 도저히 못 참겠어요.”
그 직후, 유치장 전체가 정지했다.
“이 냄새 뭐야!!”
“야, 지금 싸면 어떡해! 누구야?”
“저… 신방과 93… 김준일입니다…”
모두가 코를 막고 준일이를 노려봤다. 웃음과 욕설이 뒤섞였다.
지옥 같은 냄새 속에서, 누군가는 킥킥 웃었고, 누군가는 눈가를 훔쳤다.
그 순간 영실은 이상하게, 그 고약한 냄새와 웃음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