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던 녀석, 천사를 만나다.
나의 운은 울산 북구에서 몰아서 모두 다 써버렸는지, 경주에서는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치 경주가 울산 시민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에 대해 텃세라도 부리는 것만 같았다.
몽돌해수욕장에서 10분 거리인 경주 솔밭 해변은 휴가철이 한참 지나 그런지 무척이나 한산한 모습이다. 여기 둘러봐도 저기 둘러봐도 텐트와 차량의 사람이 없는 한 중간에 차를 세웠다. 한적한 바다 풍경의 기쁨도 잠시, 곧 관리인이 다가온다. 사유지라 차박은 만원을 내야 한다는 말씀에 사전 탐사 온 것이니 잠시 사진만 찍고 곧 30분 후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 30분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만원을 내야 한다고 재차 말씀하신다. 좀 더 강조하셨으면 야박한 인심에 기분이 상할 뻔도 했으나, 만원을 내서라도 다시 오고 싶게끔 만드는 이곳의 뷰와 조용한 힐링의 분위기에 그만 매료되어 캠핑 마니아인 동생에게 사진을 보내 캠핑지로 추천해준다. 검색해보니 개수대와 화장실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나 샤워장이나 전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설치 후 사진을 찍고 시간이 좀 남아 한 숨 돌릴 겸 의자에 앉아 아까 사둔 도넛을 한입 배어 문다. 저녁때가 다가오던 차라 그런지 맛있게 먹었다. 찍은 사진을 올리다 보니 생각났는데, 이것 때문에 배가 꺼지지 않아 곧이어 간 수렴 마을에서 저녁을 반쯤 남겼던 것 같다.
사진도 찍고, 약속한 30분이 지나 다시 차를 이동해 사유지가 아닌 해수욕장 근방을 둘러본다. 사유지가 아닌 곳에서도 캠핑이 한창이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지나가던 중 잠시 주차한 수렴 마을은 무척 정갈해 보였다. 야자수 벤치가 눈길을 사로잡아 잠시 둘러본 후, 곧바로 집으로 가려하였으나 때마침 퇴근시간이라 지나가는 도로가 많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경주까지 왔는데, 이 지역 음식을 맛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생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에 근처 여행 왔다 먹어보아 눈에 익은 아나고 횟집도 보인다. 장어가 유명한 티브이에 출연한 적 있다는 간판이 보여 들어가 보기로 한다. 같은 가격의 횟밥이나 회한소쿠리도 궁금했지만, 장어가 메인인 식당이니 장어탕을 한번 시켜보았다.
장어탕은 그냥 건강해질 것 같은 매운탕 맛이었다. 원래 기름진 음식은 많이 먹지 못하는 데다가 산책을 해도 꺼지지 않는 왠지 모를 배의 더부룩함과 기다리는 동안 밑반찬을 많이 주워 먹었더니, 밥은 한 공기를 다 비웠지만, 탕은 반쯤 남겼다. 포장을 요청한 뒤, 계산을 하려 일어났다. 그런데 나는 울산 몽돌 해수욕장에서 10분 거리인지라 여기가 경주임을 까먹고, 그만 울산 페이를 내밀어버려 잔액이 20만 원이나 남은 울산 페이가 아닌 계좌 잔고에서 즉시 출금이 되어버렸다. 윽...
이제는 정말 집으로 나서야지 하며 차에 앉았는데, 그때 마침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오늘 새로 산 고양이 조명이 떠오르면서 지금 켜보면 이쁘겠단 욕심에 여기서 3분 거리인 관성해수욕장으로 다시 향해보기로 한다.
지나가는 길에 낮에는 다소 평범했던 벽화의 거리인데, 밤이 되자 벽화 조명에도 불이 들어오자, 조용하던 마을은 낮보다 더 활기를 띤다.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한 거리가 가던 발길을 계속 부여잡는다. 나는 여기서 차박을 펼칠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아까 봐 두었던 포인트가 머릿속에 예쁘게 남아있어 아쉽지만 해변으로 다시 향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그냥 여기서 멈춰야 했다. 밤이라 어차피 해수욕장을 가더라도 사진 속 바다는 암흑이었기에... 지나고 나서 사진을 보니 밤에는 불빛이 들어온 이쪽 뷰가 훨씬 예쁠 것 같다.
평소 보았던 해수욕장 모래가 있는 차박 사진이 무척 예뻐 보였던 데다가 베뉴에는 2WD 험로 주행 모드 중 모래 주행 기능이 있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아까 찜해둔 스폿에서 겁 없이 모래사장으로 뛰어들었다. 오른쪽 편 모래 쪽에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번잡함을 피해 차가 없는 쪽인 왼쪽으로 뛰어들었는데, 아뿔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차가 없었던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닷가에서 음식을 해 드시려 준비 중인 주민께서 말씀하시길, 사륜 구동차도 못 빠져나왔기에 계속해서 빠져나오기를 시도해보았자 더 깊이 파고들기만 한다며 일찌감치 보험사에 전화해보라 권하신다. 일 년에 다섯 대 정도는 모래사장에 들어왔다가 못 나온다고..
이제 그 희소한 다섯 명 중 내가 바로 그 한 명이 되었던 것이다.
말씀 주신대로 보험사에 전화를 걸고, 40분 정도면 도착한다는 출동기사의 말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왕 모래사장까지 들어왔는데 오늘 고양이 조명도 구입했겠다 차박 키트나 한번 더 펼쳐볼까란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씨 따스한 아저씨는 내가 혹여 당황하거나 심심할까 봐 걱정이셨는지, "이럴 땐 당황할 거 없이 보험사 한번 부르면 돼" 하며 말을 걸어 주신다. 보험사를 부르면 된다는 같은 말씀이 반복되자, 나는 갑자기 짧은 시간 안에 해야 할 것들이 많아져 손과 머리는 바삐 움직이며, "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하고 입은 기계적인 웃음과 답변으로 호응했다.
"내 딸도 모래사장에 들어갔다 그만 차가 빠져버렸어. 나이 40인데 남자 친구도 없어서 나한테 전화와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더라고" 하는 말에 내가 딸 같아 이리 살뜰하게 챙겨봐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나도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상황에 남자 친구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 제일 먼저 전화했을 텐데 하는 생각과 그러기엔 이 아저씨께서 누군가에게 전화할 틈도 없이 이미 먼저 훅 치고 들어와 보험사 전화하란 소리를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스치면서, 마치 나이마저 비슷한 처지의 딸 얘기가 마치 내 상황을 모두 다 알고 하시는 얘기만 같아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이러한 잠깐의 감상과 감동도 잠시, 곧이어 지나가는 지인분을 붙잡고 큰 소리로 저기 저 아가씨가 지금 모래사장에 차가 박혔는데, 남자 친구도 없는가 봐하며 온 동네가 다 들릴 목소리로 나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TMI 리포터를 자처하셨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머리를 잠시 좀 박아 넣고 싶은 심정으로, 차박을 더 열심히 꾸미는 척을 하며 최대한 내 머리를 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분의 족집게 코치 덕에 나는 힘을 더 빼지 않고 당황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보험사에 연락할 수 있었고, (아마 혼자였다면 모래 주행 모드를 계속 시험해보다 실패하고 방법을 몰라 당황했을 것 같다.) 내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조명을 하나 둘 키기 시작하자 등불이 되어 내 편으로 강한 랜턴을 비춰 길을 밝혀 주셨고, 마지막에 나갈 때는 손님 배웅하듯 손수 친절히 배웅까지 해주시며, "이젠 모래사장에 들어가지 마잉~"하고 따스한 조언도 건네주셨다. 연신 감사하단 인사를 건네며, 혹시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가 보내주신 천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에 스치며 그 자리를 뜨게 되었다.
구세주 같던 출동기사 분께서는 간단히 차량에 고리를 걸어 5분 만에 내차를 빼내 주셨고, 험로 주행모드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모래가 그저 많은 곳에서 쓰는 것일 거다 말씀하시며, 차량 하단 부분에 소금기 많은 모래가 많이 붙었을 테니 차량 부식이나 훼손을 막으려면 오늘 바로 세차장에 가서 물로 씻어는 것이 좋다는 말씀에 나는 곧장 근처 세차장으로 향한다. 스팀 소독도 할 겸 항상 손세차를 맡겼는데, 나 혼자 세차장에서 세차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동전을 넣고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세차를 끝내기란 마치 런닝맨에서 시간 내 미션이라도 수행하는 것 같았다.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보아도 5분이란 시간은 정말 짧고도 짧았다. 시간이 끝나 멈춰진 세차봉은 잠시 내려둔 채 숨을 고르며, 하단 세차를 다른 부위에도 한번 더 하기 위해 차의 위치를 약간 뒤로 움직여 조정해놓고, 거품솔로 여기저기 좀 더 문질렀다. 지폐를 다시 교환해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심기 일전의 비장한 각오로 다시 동전을 기계에 넣는다.
스타트!
세차 총을 들고 액션물이라도 찍듯이 자세를 낮춰 포복자세로 소금기 요주의 부위의 하단부를 겨냥해 물대포를 한차례 발사했다가, 차 주위를 미친 듯 뛰어다니며 레이저 빔을 쏘듯 쭈욱 물 빔을 쏴서 거품을 걷어내다 보니 어김없이 짧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끝이 났다. 세차가 끝날 무렵 거의 녹초가 되었지만, 걸레로 차를 슥슥 문지르다 보니 원래 내차가 이 색이었나 싶을 고유의 맑은 흰색을 되찾아가는 차를 보며 뿌듯함이 차오른다. 조카들을 데리고 차박을 떠나기에는 차가 다소 지저분해 손세차를 한번 맡기려던 차에 마침 잘됐단 생각도 들었다. 막상 셀프세차를 혼자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기계식 세차의 차 손상 우려에 벗어나 합리적 가격으로 한 번씩 이렇게 직접 세차를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모래사장에서 한 차례 멘붕을 겪은 나는 불꽃같았던 세차 전투 후 급 피로감이 몰려와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면서도 비몽사몽 했다. 주유소를 나와서 달리고 있는데 좌측 뒤차가 경적을 약하게 울리기에 내가 멀 잘못했나 싶어 두리번거려도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던 중, 좌측 미러로 시야에 들어오는 덜렁거리고 있는 주유 뚜껑이 눈에 들어온다! '나 방금 주유했소' 온 동네방네 광고라도 하고 다니듯, 나는 주유 뚜껑을 열어놓은 채 달리고 있었다. 얼른 차를 옆으로 대고 주유 뚜껑을 닫는데, 내 옆으로 멈춰있던 차들의 시선 강탈! 어두워 차 안이 보이지도 않지만, 옆에서 신호 대기하는 차들 속 왠지 모를 수많은 시선이 등 뒤로 느껴지는 듯해 후다닥 문을 닫고 운전대를 잡아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나의 긍정의 끝은 어디인지. 차오르는 부끄러움과 함께 그래도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처럼 주유기를 꼽고 달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렇게 시트콤보다 더 시트콤 같은 코믹 콩트 한 편을 찍고 돌아오니 나는 그만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만 같다.
정말 다이내믹한 하루였다.
그리고 며칠 뒤 인터넷으로 관성 솔밭해변의 후기를 검색하다 보니, 1년에 5 명의 확률에 들어가 계신 또 다른 분의 글이 상위에 떠서 읽어보다 폭풍 공감했다. 날짜도 바로 한 달 전쯤이다. 이 분은 트레일러로 끌고 지나가던 행인 두 명이 밀어주신 주변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좀 고생을 하다 빠져나오신 듯하다. 보험사를 부르면 이보다 수월하므로 이처럼 모래사장 늪에 빠진 분들이 계신다면, 당황하지 말고 바로 보험사를 먼저 불러 차를 모래늪에서 빼내고, 가까운 세차장을 찾아 차량 밑 부분을 꼼꼼히 물로 씻어 내야 되는 걸 기억해두시길... 만약 보험사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차 하단 부분의 모래를 씻어내줘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횃불과 같은 사주라더니..
나의 실패를 공유해 더 많은 이들이 이런 불편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면 이 정도쯤은 언제든지 웰컴이다. 천사를 만난 덕에 다행히 심한 고생은 면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어떤 기억보다 더 진하게 남아있을 나름 추억이 될 경험이 될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