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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Sep 11. 2021

존중받아야 할 당신의 선택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020, SBS)

계절에 따라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다.

꽤 오랫동안 여름 하면 <커피프린스 1호점>이 생각났고, 겨울이면 제목의 영향 탓인가 <그 겨울바람이 분다>가 생각난다. 뚜렷한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여름과 겨울에 유독 생각나는 드라마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바람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싱숭생숭한 마음이 드는 게, 잔잔한 드라마가 생각난다. 그렇다, 드라마 보는데 계절은 거들뿐. 그래도 가을만큼 멜로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 없다.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하 ‘브람스’)>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패로 돌아간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를 모티브로 음대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다. 초반에 송아(박은빈 분)와 준영(김민재 분)이 청계천에 앉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때문인지 드라마에 삽입된 연주 곡들이 감성적인 연출에 묻어 나와 그런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살랑살랑해지는 게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드라마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가을 계절 타이틀을 붙이게 했다. '브람스'만의 감성적인 연출은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돕는다. 사심을 담아 영업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기에 꼭 보고 갔으면 하는 브람스만의 감성 장면을 먼저 소개하고 싶다(장면 바로가기​, 다른 장면 바로가기​).


하지만 이런 연출 때문에 일 년이나 지난 작품을 아직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때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는 건 아니다. 나는 이 드라마를 꿈과 현실 앞에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람들에게 권했다. 주인공들이 꿈을 꾸며 현실 사이에 고민하는 내용은 드라마 소재로 자주 등장하지만, ‘브람스’가 보여준 고민의 과정은 꽤나 현실적이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 몰입하며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지금의 자신에게도 좋은 인사이트를 줄 것이란 믿음이, 내가 이 드라마를 강력 추천하는 이유다.


나는 아직도 드라마 <미생>을 보지 못  했는데, 그건 내가 너무나 ‘미생'이라 과몰입할 것 같아서다. 비슷한 맥락으로 '브람스'가 방영되었을 당시 자신이 하고 있는 고민의 모양과 닮아서 '브람스'를 보는 게 힘들다고 하신 분들이 있었다. 송아가 하는 고민은 지독히도 현실적이라, 비슷한 고민으로 힘들었던 때를 떠올릴게 했나 보다. 음대에서 송아가 겪는 갈등은 드라마에게 '음대 다큐멘터리'라는 칭호를 붙일 정도로 실제 환경과 비슷했고, 그런 경험이 있었음을 고백하던 댓글들도 기억난다. 드라마를 쓴 류보리 작가가 음대 출신이라 극 중에 담긴 고민과 갈등을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녹였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듯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드라마가 갖고 있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지키느냐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진학이나 구직처럼 진로를 결정할 때 자주 한 고민은 '좋아하는 일'이냐 '잘하는 일'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였다.


송아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처음 만난 건 어릴 적이었겠지만,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한 건 대학교 4학년 졸업반 때다. 그동안 그녀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모두가 선망하는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순조롭게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되었지만, 바이올린을 향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모두가 구직을 준비하는 시기에 음대 진학을 준비한다.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 큰 용기를 낸 그녀를  응원해준 건 동윤뿐이었다. 가족도, 가장 친한 친구 민성에게도 응원받지 못했다. 너무 늦은 거 아니냐, 재능은 있는 거냐는 말은 음대 졸업반이 된 그 순간까지 따라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주인공 버프를 받아 음대 지원을 결정함과 동시에 입시에 성공하고, 수석은 무리더라도 차석 정도 되는 실력의 연주자로 우뚝 서면 좋았으련만, 그녀는 4년 재수 끝에 음대에 입학해서 음대 생활 4년 동안 매년 꼴찌를 했다. 학교 정규 공연에서는 실력이 없으니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오직 바이올린을 향한 좋아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송아의 지난 8년의 시간은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동시에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괴로웠다. 그렇다면 잘하는 일을 선택했어야 하는 걸까?


준영은 피아노를 잘 쳤다. 처음 피아노를 연주했을 땐 그도 피아노가 좋았으리라. 하지만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연주자의 삶은 고단했다. 준영은 매일 낯선 다른 도시에서 눈을 떠 악보대로 연주를 했다. 가족의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건 그가 우승해서 받는 콩쿠르 상금이 가족의 빚을 갚는데 쓰였기 때문이었을 테다. 엄마는 아들이 자랑스러운 만큼 내내 미안해했고, 어린 아들의 고단함을 헤아리지 못 한 아빠는 어렵게 벌어온 돈을 또 다른 이의 보증을 서줌으로 탕진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생계형 연주자로 살면서 피아노에 가졌던 준영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래도 잘하는 일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좋아하는 마음 하나 없이 버티던 준영의 모습은 바싹 마른 나뭇잎 같아 보였다. 그런 자신의 연주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준영에겐 그 또한 고민이었으리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앞서 설명했듯 브람스의 사랑에 빗대어 송아와 준영 그리고 정경의 빗나간 사랑의 구도를 다루고 있는 한편, 스물아홉 경계선에 선 주인공들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준영이 안식년을 갖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보낸 1년은 졸업을 앞둔 시기로, 준영은 물론 송아와 현호, 정경이의 인생에서 또 한 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 1년을 천천히 풀어가는 과정 속에 나는 나의 스물아홉을 자주 떠올렸다. 송아처럼 서른 전에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 사표를 던졌고, 1년 뒤 나는 이름만 다른, 이전과 같은 업무를 할 수 있는 어떤 회사에 취직했다. 1년 전 그 자리로 되돌아온 셈이다. 어떤 이는 내 선택이 섣불렀다며 재능은 있던 거냐고, 고작 그 정도에 꺾일 마음이었냐고 물었다. 결과적으로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지 못했으니 옳지 못한 선택이었고 그러니 실패로 보는 눈초리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보는 시선으로 나를 보며 좋아하는 마음 하나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실패자라 여겼다. 하지만 그 1년이, 좋아하는 일을 향한 도전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깨닫고 있다. 당시엔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지금 나는 나를 더 이상 실패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인생이 단편적이지 않은데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둘 중 하나만 선택하려 했다니, 생각이 좁았다. 잘하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일을 곁에 둘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일이 잘하게 될 수도 있고, 잘하진 못 해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상황도 있다. 반대로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어도, 잘하기만 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때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의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 혹은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은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었고 시도나 노력도 해보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이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에선 내가 좋아하는 요소도 분명 몇 개는 있다. 는 것도 존중받아야 할 삶의 방식이다."


임경선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바이올린을 선택한 송아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우리에겐 없다. 송아가 바이올린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3-4살 때부터 레슨을 받아 온 이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가 몰랐을까? 우린 그녀가 얼마나 크고 간절한 마음으로 음대를 지원했는지 다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우선 응원을 해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으로 내내 송아와 준영, 현호와 진경을 응원했다. 그럼에도 선택을 해야 하는 졸업 연주가 다가오면서 주인공, 특히 송아와 준영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 가서 이들이 내린 선택을 보면서 그 과정마저 이들이 자신만의 선택을 내리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같은 모양의 고민을 가졌던 나의 지난 시간이 생각나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엔딩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회로 송아가 외국 유학을 가게 된다거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대학원에 합격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바이올린을 향한 송아의 마음을 아니까 송아에게 그런 기회가 생겼다면 좋았을까? 아니다. 근래 본 드라마 중 ‘브람스’의 엔딩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송아가 송아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는 점에서다. 세상은 다른 선택을 하려는 그 순간조차 송아에게 어떤 굴레를 씌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닌 오롯이 자신이 일궈온 노력으로, 지난 시간 동안 느끼고 깨닫고 그래서 다짐한 마음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자기 다운 미래를 선택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회는 앞 회차에 나누었던 대사가 수미상관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많았다. 송아가 내린 결정이 처음 그녀가 음대 입시를 결정했던 순간엔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라고 해도, 바이올린을 만났기에, 충분히 사랑했기에 만날 수 있는 미래였다고 생각한다. 브람스가 평생을 사랑한 사람이 선배 음악가 슈만의 아내였단 사실이 어떻게 보면 그의 사랑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사랑 덕에 만들어진 수많은 명곡을 생각한다면 실패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니 송아의 선택이 아쉬울 리가 있을까? 나는 송아와 준영이 행복하길 바랬고, 그들이 자신들만이 행복을 찾은 것 같아 가슴 벅찼던 마지막 회였다.


개인적으로는 송아의 서사에 몰입했지만, 어떤 이는 잃은 마음을 찾아가는 준영에게, 또  어떤 이는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것처럼 보이는 현호의 고민 속에서, 그리고 정경이와 동윤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고민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스물아홉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마음에 소망하는 일로 고민이 있다면 이 가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봐 보는 건 어떨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웨이브에서 관람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고민했고 낙담했고 또 즐거웠다면, 처음과 다른 선택일지라도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는 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사 편 1> 바로가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사 편 2> 바로가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사 편 3> 바로가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사 편 4> 바로가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사 편 5> 바로가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사 편 6> 바로가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총 16부작으로

연출 조영민, 김장한 극본 류보리

제작사 스튜디오 S 방송사 SBS
박은빈(채송아 역), 김민재(박준영 역), 김성철(한현호 역), 박지현(이정경 역), 이유진(윤동윤 역), 서정연(차영인 역) 등이 출연합니다.


본 원고는 wavve 리뷰단 활동의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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