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혜 Jan 06. 2021

'얼굴'에 관한 사색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사람은 늙으면 아기 얼굴이 되는 모양이다,라고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왔나?"

  고작 두 글자를 말 하면서, 크리스마스 날 '레고'나 '공룡 인형 세트'를 선물 받은 아이 같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라니. 나이 먹어 오랜만에 자식을 만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의미 따위 따질 겨를도 없 마냥 좋을 뿐인 걸까.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와 똑같이 호응해 주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호락호락 마음을 내어줄 만큼 나는 쉬운 딸이 아니.
  
 그리고 그건 다 이 여성 때문이다.

  "왔네!"

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마중 나온, 오랜만에 본 얼굴이 어째 더욱 대추나무처럼 쪼그라든 듯한 엄마라는 사람 때문...

  가끔씩 난 아버지가 전설 속 동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배우자의 기쁨과 젊음을 살라먹고 자란 해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두 사람의 얼굴이 대조적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은 나날이 삶의 환희를 느끼는 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다른 쪽은 나날이 시드는 싸리꽃처럼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니.


  원통하고 분하다.
  모든 권리를 남편에게 양보해야 '현모양처'라고 가르쳐준 시대가, 자기 자신을 챙길 줄 알아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은 그 누군가가 미워서 못 견디겠다.


  딱하고 짠하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자라 남편에게 순종하는 법 밖에는 모르고 자란 여자의 삶이. 자기가 믿는 틀 안에 갇혀, 요구하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삶이.


  그런 삶을 30년 동안 산 여인에게 주어진 선물은 고질적인 불면증과 남편 대신 갚아야 하는 빚이라는 사실은 내해결되지 않은 의 아이러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속이 쓰린 내가, 바라본 거울 속에는 어느 슬프고 비겁한 얼굴을 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제가 본 부당함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침묵한 대가로 아이도 이제 작은 해태의 얼굴을 얻었다. 리고 그 해태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기쁨과 젊음을 살라먹으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 듯하다.
  

이전 07화 '돈'에 대한 사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