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쇼핑몰 여기저기 하릴없이 걷기를 수십 분, 드디어 아이가 잠이든 걸 확인하고 나는 미뤄두었던 twg에 왔다. 애프터눈 티 타임만큼은 조용히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리보다 하루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남편과 인사를 하고 뒷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일렁였다. 전날 밤 남편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자꾸만 떠오른 탓이다. 남편은 우리 세 식구를 위해 더욱 즐겁게, 열심히 살아 보겠다 말했고 그런 남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여행에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 아무리 내가 남편에게 우리를 위해서만 살지 말라고 해도 가장인 남편의 이런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160 HKD짜리 레고를 사주면서도 남편은 아이에게 이런 걸 사주지 못하는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까라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사랑하는 내 가족이 하고 싶은 걸 해주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자신이 너무 괴로울 것 같으므로 더 열심히 일하겠단다. 그러면서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 잘 안다고, 가족만을 위해 사느라 자기를 잃거나 번아웃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뗄 생각도 없던 내 입을 막았다. 그 마음이 너무나 거대하고 단단해 보여 나는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그저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편의 저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그토록 이타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물론 나와 남편 모두 그 기저에 남편 스스로 번듯한 가장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남편의 그 마음에 박수를 보내기로, 고마워하기로 했다. 예상컨대, 앞으로 우리는 이 여행 속 다짐을 이행하는 과정 속에 각자의 시행착오를 거치게 될 거다. 하지만 예전처럼 막막하지만은 않다. 지난 5년간 버려낼 것 못지않게 쌓아온 좋은 것들이 우리 안에 두둑하게 있으니 걱정보다 기대를 걸어 보기로. 결국은 서로를 사랑하고 섬겨야 하리라. 내가 더, 상대보다 내가 더.
전날 남편이 내게 했던 말들 중 잊을 수 없는 고백이 하나 있다. 자신을 이해해고 뒷받침해주는 나의 내조가, 자기의 노력만큼 드러나지 않는 게 미안하다는 말. 남편은 자기가 글이라도 써야 하나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그의 말로 모든 게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정말이지, 남편의 그 마음이면 족하다.
이제 막 아이가 깨려는 지 몸을 뒤척인다. 아이와 남은 일정을 잘 소화하려면 내게 인내가 필요한데, 부디 남편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인정의 고백이 내게 그 힘을 부어주기를. 가족을 떠올릴 때 가슴 한복판에서 느껴지던 묵직한 무언가를, 이번 여정이 덜어내 준 듯하다.